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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빙 Jul 17. 2021

영화 허쉬 리뷰

표출하지 못한 욕망의 아우성


삼원, 삼불원이라고 하는 원숭이를 혹시 아는가?

좀 더 자세히 묘사를 하자면, 원숭이 세 마리 중 한 명은 눈을 막고, 한 명은 귀를 막고, 한 명은 입을 가리고 있는 모습. 그 의미는 '부정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라는 불교의 개념이라고 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삼불원(출처_freepik)



갑작스럽게 삼불원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름이 아니라 이번 이야기는 바로 표현, 발화에 대한 욕망에 대한 것이다.



정확히는 '보고, 들어야만 하지만 말하지는 못하는 이'의
표출하지 못하는 욕망의 아우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 인적이 드문 곳, 한 여성이 사는 집이 있다. 썩 유복한 듯, 번듯한 이층 집이 침묵 속의 숲 속에서 우뚝 서 있다. 유일한 이웃 친구는 집에서 십여분 떨어진 곳에 사는 부부뿐. 말 그대로 정적뿐인 세상. 하지만 여기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 주인공에게는 정말 정적뿐인 세상이라는 것. 어릴 때 병으로 청력을 일었고, 성대마비에 걸렸다. 그가 이해하는 세계는 이제 보고, 촉감으로 느끼는 세계뿐이다. 이 집에서 가장 큰 소리라곤 엄청나게 시끄럽고 진동을 내뱉는 경보기뿐이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점. 그리고 아주 내부에 아주 독특한 '목소리'가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써?라는 친구의 질문에 주인공은 이렇게 (수화로) 답한다.


 '엄마는 작가 뇌라고 하는데, 가능한 모든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재생돼 영화처럼'이라는 것이다.

독특한 점은 그 형태가 목소리라는 점이다. 그것도 주인공이 13살 이후 더 이상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말이다. 그것도 잔소리 쟁이의 짜증 나는 형태로.



 사실 주요 스토리만 보면 영화는 극히 간단하다.

 혼자 사는 청각 장애인 작가가 미친 연쇄 살인마를 만나고, 살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

 하지만 여기에 제목과, 청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을 더하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왜

 왜 청각장애인일까. 주인공에게 페널티를 주기 위해? 하지만 주인공은 여자고, 연쇄살인범은 무기를 지닌 남성이다, 구조를 요청할 데도 없는데 이미 충분한 페널티 아닌가? 뭐,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지. 뭔 쓸데없는 거에 집중하고 있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침묵의 영화 속에서 욕망의 아우성이라는 단어를 잡아낸 건, 살인마의 한 대사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엔 넌 참는 것 같단 말이지. 제대로 건드려주면, 너도 비명을 지를 수 있을걸?"


 거기서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비명과 목소리. 그리고 쉿, 숨을 죽이다는 의미의 영화 제목.

그제야 이 영화가 나에게는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뭐... 감독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성관 없을지 몰라도, 김춘수의 꽃과 같이,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 영화가 된 것이다.

 이 영화는 그냥 살인마로부터 살아남는 가련한 여자의 얘기가 아니라고, 오히려 스스로 억눌려왔던 한 여성의 욕망을 터트리는 거대한 이야기라는 걸.


영화의 싸움의 대상은 자신이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것 역시 자신이다. 즉 아우성인 셈이다. 욕망의 발현, 폭발?이라고 해야 적합할까. 이 시각에서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주인공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목소리의 부재이다. 청력이 없다는 것 역시 중요한 점이지만, 주인공은 입술의 모양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타인의 의견과 의사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반대이다.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제외하면, 문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주인공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즉, 주인공과 세상의 관계는 철저하게 일방향적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하자면, 메디는 그저 세상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세상을 가만히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 겠지만.


 사실 목소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단어이다. 단순히 인간의 성대를 통해 나오는 소리 외에도, 자신의 의견, 발언, 혹은 사회적 영향력까지 그 의미는 다양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메디의 직업이 소설가인 것 역시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볼 수 있다. 메디에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세상에 확실하게 알릴 수단은 글뿐일 테니까.

 물론 그녀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어, 수화를 배우려 노력해주고 이해하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친구들의 선의이자, 이해다. 이해는 시혜적인 지위의 사람이 베풀 수 있는 행동이다. 거기다가 메디는 상당히 자아가 강한 캐릭터이다. 영화를 보면 쭉 알겠지만, 그녀는 말로 표현을 안 할 뿐이지 내면에 잔소리를 하는 이야기꾼이 있다고 했다. 표현이 그럴 뿐이지, 사실 이 잔소리꾼이란 건 결국 자아의 목소리이다. 다만 그 표출 형태가 단호하고 엄격할 뿐이다. 마치 부모님처럼 말이다. 공교롭게도 청력을 상실하고 성대마비가 걸린 나이가 열세 살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목소리의 형태가 잔소리쟁이처럼 들리는 것 역시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에게 도시란 당연히 불편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작가는 말과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다. 심지어 메디는 소설의 엔딩을 무려 일곱 가지가 고려하며, 각각 엔딩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생각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가만히 타인 의견을 듣고만 있어야 한다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메디는 도시가 시끄럽다고 했다. 메디에게 소음은 단순히 자동차 배기음 같은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 의견인 것이다. 즉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아와 욕망을 표출하는 거대한 도시는 메디에겐 소음으로 가득 찬, 거기다가 이를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공간인 셈이다. 자신 혼자만이 호의를 베푸는 상대를 만나 거다 필담을 해야만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메디에겐 도시란 시끄러운 소음 가운데에 자신만 조용히 침묵하는 공간이다. 당연히 외로우지 않을 수가 없다.


 차라리 숲 속이라면, 아무도 없는 낯선 공간이 그녀에게는 덜 외로울 거다. 여기선 적어도 일방향적인 강요를 당하진 않으니까, 떨어져 살지만 수화를 이해하는 친구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부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 글 안 써진다. 돈이나 그냥 줬으면, 피곤해. 다음 작품은 망할 듯...'이러고 말 내용도, 그저 노트북에 적어야만 한다. 내면의 욕망을 표출하고 싶은 욕망은 그저 조용히 차곡차곡 뭍 어두 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사이코 살인마가 찾아온다.

 메디의 설정이 독특하다 했지만, 이 범인도 만만찮은 인물이다. 가면을 썼고, 석궁을 무기로 들고 있다. 사람을 천천히 재미로 사냥하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형 연쇄살인마. 살인이라는 행위가,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가장 오래되고 절대적인 금제라는 걸 생각해보면, 욕망에 의해 편한 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는 본인의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내부 욕구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살인마는 메디와 가장 양 극단에 있는 인물인 셈이다.


 메디는 가장 처음부터 살인마와 필담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투명한 유리문을 사이에 둔 둘의 대화는 일방향적이다. 애초에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다. 살인마는 반드시 메디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도움을 요청할 수단도 없다. 탈출이 가능한 방법도 없다. 죽음을 강요받는 상황. 생명체로써 가장 소중한 것을 억지로 강요받는 상황. 일반적인 강요에 지쳐 숲으로 왔는데 오히려 가장 극한의 강요를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두 욕망이 충돌할 경우 가능성은 답은 하나뿐이다.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전자는 죽음이고 후자는 삶이다.

 물론 메다가 처음부터 둘 중 하나를 결정한 건 아니다. 평범한 일반인 여성이 그러하듯, 메디도 처음에는 도망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한다. 하지만 곧 이 시도가 실패하게 되자,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온갖 가능성을 예측하며 내린 결론

 '싸우자'

 메디는 스스로의 상처에서 난 피로 글자를 쓴다

 '덤벼봐'

 쾅

 억눌려있던 욕망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입으로 말하는 대신, 주먹으로 창을 치며.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낸 공격적인 소리인 셈이다.


 이 소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점은 클라이맥스 부분인데, 온통 고요하던. 상처가 나서 지압하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고요하던 집안이 가장 떠들썩해진다는 점이다. 바로 알림 벨. 메디의 집에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번쩍거리는 알람벨이 있다. 청각장애인인 메디가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진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소리와 빛이 나는 경보기 말이다. 메디는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음과 빛을 내는 알림 벨을 들이대며 살인마를 몰아붙인다. 마치 '내가 여기 있다고!!!!!'하고 외치듯 말이다. 여태껏 숨겨왔던, 억눌렸던 목소리를 터트리듯 말이다.

 그리고 살인마의 목을 찔러, 살인마를 죽인다.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경찰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후련한 듯 계단에 앉아 눈을 감는 메디의 모습은 과연

살아났다는 안도에 의한 것일까, 아님 처음으로 신체적 장애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표면에 숨겨왔던 자신의 거대한 욕망을 표현했다는 후련함 때문일까. 상상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때의 메디의 표정이 영화 속 어느 때보다, 가장 후련해 보이고 편한 표정이었다.

 집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억눌렀던 욕망이, 가장 극단의 욕망과 충돌하며 분출하는 영화 허쉬.

 여러분은 해석은 어떤가.

 언제나 상상은 자유롭고, 해석은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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