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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MRH Dec 20. 2022

가난에 관한 고찰

가난하지 않은 삶

  가난하다. 가진 것이 없다. 어쩌면 난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난 돈이 무섭고 그래서 몇 푼어치에 덜덜 떨기 때문이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도 구매를 미루거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거나 심지어는 불편한 줄도 모르고 산다. 


  그게 진짜 가난이다. 명품이나 부동산을 사지 못하는 게 가난이 아니라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 그때가 진짜 가난한 것이다. 가난이 습관이 될 때. 난 그때가 가장 가난한 상태라고 보았다. 마치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에 기꺼이 순응하며 살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상태에 순응하며 사는 것. 그건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나의 첫 스승님인 엄마는 늘 내게 말했다. 돈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늘 받은 용돈을 쓰지 않고 신줏단지 모시듯 모셔놓은 나에게 한 말이었다. 돈의 가치는 쓰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랬다. 내가 어떻게 그 돈을 쓰냐에 따라 같은 액수의 돈이라도 가치가 달라지고 종국엔 나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도 우리 엄만 교육에 열을 쏟았다. 엄마에게 돈의 가치란 교육에 투자할 때 가장 값비싼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이것들을 배워야 하느냐고. 그 돈을 빚을 갚는데 쓰는 게 더 낫지 않냐고. 

"살면서 할 줄 아는 스포츠 하나,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읽고 쓸 줄 아는 외국어 하나는 있어야지."

그게 나중에 내가 나이가 들면 빛을 발할 거라고 했다. 당연히 만만치 않은 교육비가 들었지만(우리 삼 남매 모두 어렸을 때 이 교육과정을 거쳤다) 엄마는 아까워하지 않았다. 새벽 내리 1, 2원짜리 부업을 하면서도 아파트 대출이자에 허덕이면서도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면서도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수영과 피아노(심지어 나는 플루트도 했었다. 엄마 미안), 영어 교육에 투자했다. 그게 고등학교 내신 성적이나 수능 성적을 올리는 데엔 전혀 일조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심지어 난 오로지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밥벌이가 되지도 않을 것 같은 고고학과에 진학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대학 내리 현실보단 학문과 낭만을 쫓았던 딸이지만 엄마는 내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취업하라는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학부를 졸업하며 석사 과정을 밟고 싶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등록금을 보태주었다. 난 다들 우리 집 같은 줄 알았다.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던 내 친구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미대가 아닌 간호대에 진학했다. 세상에서 수학이 제일 싫지만 문과보단 이과가 취업이 유리하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전공을 이과로 선택한 애들도 있었다. 고고학과는 비전이 없어서 일찌감치 전과하거나 편입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보는 동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학번에서 전공으로 먹고사는 애는 나 포함 3명이다. 오죽하면 난 대학원 입학 동기가 없다. 그 학기에 나 혼자 입학했다. 난 늘 내가 하고 싶은 걸 선택했다. 태어나는 것과 부모가 누군지만 빼면 내 인생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학생일 땐 누구나 그렇지만 돈이 없다. 그래도 난 돈이 없어서 자격증 시험을 못 보거나 친구를 만나지 못하거나 여행을 가지 못했던 적이 없다. 결코 풍족하게 산 것은 아니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난 내가 원하는 건 거의 다 하고 살았다. 


 그제야 난 우리 엄마의 돈의 철학이 생각났다. 현실을 직시하고 살았던 나의 친구들은 내게 늘 묻는다. 넌 어떻게 그렇게 취미가 다양하냐고. 어쩜 그렇게 좋아하는 것엔 진심이냐고. 취미 생활을 물어봤을 때 딱히 없다고 하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대체 뭘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냐는 질문에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와 달리 난 엄마가 옛날에 힘들게 벌어 시켰던 수영, 피아노, 플루트를 취미로 즐기고 있었고 그 덕에 학교 관현악단이나 밴드부 활동도 할 수 있었고 튜브 없이도 물에 빠지지 않고 잘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영어로 된 가벼운 소설책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배워 본 적 없는 다른 악기나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고 그것들은 나의 건전한 취미 생활이 됨과 동시에 남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했다. 결국 나의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 셈이다. 


  나 역시도 돈이 없어서 먼 길을 기어코 걸어서 간 적도, 비싼 물건을 살 땐 몇 달, 몇 년씩 고민하기도, 다 해진 옷도 아깝다며 그냥 입기도 했다. 물론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지금도 가끔 그런다. 그래도 나를 아는 남들은 날 가난하게 보지 않는다. 그냥 저런데 돈 쓰는 거에 관심 없는 애로 볼뿐이다. 그들에게 난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니지만 배울 거 다 배운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후줄근하게 다녀도 몇 년씩 공부한 전공과 음악, 미술에 대해 얘기하면 아무도 날 우습게 보지 않는다. 심지어는 '쟨 검소하잖아'로 나의 돈 없음이 포장되기도 한다. 그래서 엄마가 기를 쓰고 그렇게 우리를 가르쳤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엄마가 한 또 다른 웃긴 말이 생각난다.

"노동자의 자식은 결국 노동자야. 평생 남의 돈 받으며 일할 거라면 배운 거라도 많아야지."

맞는 말이다. 남의 돈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라도 배운 게 많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은 선생이다. 


  가난하다는 건 돈도 없지만 돈이 없어서 배운 것도, 아는 것도,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하는지도, 어떤 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날 존경하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난 가난하지 않으려고 돈을 쓴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 경험해 보는 데에, 즐기는데에 진심으로 임한다. 한 번 배우고 경험한 것은 꽤나 오래, 어쩌면 평생 나의 자산이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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