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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MRH Feb 15. 2023

다정한 그들에 관하여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들에게

  최근에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 정리 같은 심리학 책인가 싶기도 한 제목이지만 이 책은 생물학 책이다. 말 그대로 다정하고 친화력이 좋은 개체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생물학에서 거의 신과 같은 다윈의 적자생존을 반박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책에서의 적자생존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의 논리가 아니라 사회성과 관계 맺음에 포커스를 맞춘다. 어째서 같은 개과임에도 몸집도 크고 강인한 늑대와 달리 개가 압도적인 종의 번식을 이루었는지, 어째서 인간 종은 육체적으로 강인하다고 볼 수 없는 호모 사피엔스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건지. 책에서는 수많은 동물사회실험 사례를 들어 이를 증명한다. 엄격한 신분 질서와 함께 타 그룹을 배척하는 동물들과 그와 반대로 유연한 신분 질서와 타 그룹의 낯선 동물도 포용할 수 있는 동물들의 차이는 왜 인간과 친밀한 개가 늑대보다 종의 번식에 성공했는지, 육체적으로 유약한 인간이 포식자가 없는 유일무이한 종이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친화적이고 협조적이며 이타적인 '다정한 그들'이 떠올랐다.




  책을 읽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친구 하나가 토로하듯이 말했다. 자신은 너무 무르고 눈치도 많이 보는 호구라면서. 

"다정한 건 호구야."

그렇게 말하는 친구에게 난 누군가는 다정함을 연구하기도 한다면서 책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정하다는 건 어쩌면 가장 발달한 생존 전략일 거라고. 친구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매정하기 그지없는 이 사회는 다정하고 포용적이고 이타적인 이들을 무르게 본다. 쉽게 말해 자기 입맛대로 이용한다. 다정한 그들은 타인의 도구가 되어 이리 굴려졌다 저리 굴려졌다 한다. 그들은 사람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지면서도 또 사람을 믿는 자신을 탓한다. 공감 능력도 높고 그래서 타인의 기분이나 상황에 쉽게 자신을 맞춘다. 눈치도 많이 보고 사기당하기도 잘 당한다. 그들은 사람을 잘 믿는다. 그게 그들을 힘들게 한다. 

  함께 놀면 친구는 늘 내게 맞춰줬다. 하고 싶은 것, 만나는 시간, 장소 등 거의 과반수는 내가 정했을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자라고 해도 친구는 맞추는 게 편하다고 결정을 미루었다. 친구가 좋아할 만한 걸 생각해서 내 결정인 척 골라도 친구는 금세 눈치를 챘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한, 그래서 나도 기억 못 하는 내 말도 친구는 기억했다. 가끔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린 동등한 관계인데 늘 활동과 기억의 중심은 나였으니까. 친구가 내게 해주는 것만큼 내가 해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표현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었다. 늘 언제나 기억력과 센스에 있어선 친구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개인 맞춤형 선물 고르기 일화를 듣고 나선 결국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친구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친구는 아주 다정한 사람이다. 그리고 난 그런 친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고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반드시 자신이 먼저이며 기억 또한 언제나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다. 친구는 다정한 것이 호구라고 했고 그들이 사람을 잘 믿어서 생기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다. 신뢰라는 건 조약과 같은 비교적 쉽고 명확한 것이 아니기에. 다정한 그들은 이방인도 비교적 쉽게 포용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다양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게 그들의 강점이다. 그들은 그룹 내에서 눈에 띄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캐릭터다. 다정한 그들이 없는 그룹은 오래 존속하기 힘들다. 

  누군가는 그들을 이용하고 그럼에도 사람과의 신뢰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속없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정한 그들은 그들을 이용했던 사람들보다 더 양질의 삶을 살 확률이 높다. 다정한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외롭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인생에서 보다 많은 조력자를 만날 것이다. 개가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쌓으며 성공적인 종의 번식을 이끌어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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