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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bi미경 May 07. 2024

다시 태어나면 부리키스를


남편과 나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 그는 가정적이고 다정하고 사려 깊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뽀뽀를 하고 안아준다. 설거지 청소도 대부분 그가 해주고 주는 대로 먹고 없으면 본인이 해서 먹고 주말 삼시세끼는 무조건 그가 요리한다. 삶의 1순위를 가족과 나로 두고 거기에 맞춰 생활하고 감정변동이 없고 긍정적이다. 아이와 몸 바쳐 놀아주고 10년간 아이에게 단 한 번의 짜증도 낸 적이 없다. 그래선가 우린 사이가 좋아 둘이서도 잘 놀고, 둘이 있어야 편하고, 둘 중 누군가 없는 자리는 금세 허전함을 느낀다. 아- 이렇게 쓰니까 세상 이런 남편이 없을 것 같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우린 이런 사이는 아니었다. 예전의 그는 내겐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땐 그가 스킨십을 해도 뜨밤을 위해 형식적으로 하는 제스처라고 생각했고 집안일을 해도 내가 해놓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하는 것만 같았다. 주말에 해주는 그의 요리는 음식보단 지저분해진 주방 때문에 짜증이 났고 감정변동이 잘 없는 그의 모습은 차가운 냉혈안 같이 느껴졌다. 그의 행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쭉 같았던 것 같은데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따라 그는 악마가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했다.     


결혼 후 우린 많이도 싸웠다. 누구나의 결혼생활이 그렇듯 사소한 문제들은 상대방의 기분에 따라 큰일이 되곤 했고 시비를 걸고 그 시비를 받아치며 서로의 정당성을 우기곤 했다. 3주 동안 말을 안 하고 지낸 적도 있었고 그 시간 동안엔 서로의 숨소리조차 경멸했다. 치고받지만 않았을 뿐이지 눈빛과 제스처만으로도 속에서 피가 철철 흐르게 만드는 내상을 입혀댔다. 당연히 이혼을 상상해 본 적도 많았고 진지하게 이혼절차와 그 후 계획을 그에게 나열한 적도 많았다. 한 번이라도 그가 내 밀어냄에 응했더라면 우린 지금 함께 있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백곰 같은 성격이라 차갑고 우직하게 지켜야 할 자리는 지켰고 난 튀어 오르는 멸치처럼 뒹굴었다가 고래고함을 질렀다가 울고불고하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다.     


백곰과 멸치는 성향이 너무 달랐다. 백곰을 먼저 사랑했던 멸치는 자기 꼬리를 찍으며 결혼생활을 후회했고 백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멸치의 쉴 새 없는 공격에도 무뚝뚝한 백곰 때문에 멸치는 분노와 짜증이 밀려와 마른 멸치가 돼버릴 지경이었다. 이러다 머리에 고추장이라도 찍어서 백곰에게.. 아- 이게 아닌데. 멸치는 정신을 다시 차려본다.      


그와의 결혼생활은 다른 부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수종 부부처럼 특별히 다정하지도, 막장드라마 속 부부처럼 특별히 유별난 문제가 있지도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끝내주는 인내심인 것 같다. 감정변화가 심한 나는 같은 행동을 해도 내 기분에 따라 그를 다르게 봤고 그때마다 없던 잘못을 만들어내서라도 싸움을 걸곤 했다.(진정 잘못이 있을 때도 많았다) 크고 작은 싸움들을 하고 난 후 밀려오는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누군가 잘못을 하고 사과를 이끌어냈어도 부부싸움은 얻는 것보단 잃는 게 항상 많았다. 서로의 바닥을 매번 확인해야 했고 죽일 듯 서로를 미워하는 감정을 키워야 했고 화해의 과정 또한 찝찝한 감정만 남곤 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종종 해보곤 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결혼생활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가 내 인생에서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내 아이의 아빠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결론은 매번 같았다. 그가 아니면 안 됐다. 내 옆자리는 그여야 했고 그의 옆자리는 나여야 한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도 복합적이지만 하나의 단어로 말하면 언제나 결론은 사랑이다. 15년을 함께 했지만 그의 손을 잡으면 아직도 설렘을 느끼고 그가 안아주면 아직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연애가 아닌 현실이라는 삶을 함께 하면서 설렘이란 감정에 취할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순간순간 사랑을 느낀다. 그에게 언제나 여자로 보이고 싶어 집에서 글만 쓰는 나날이지만 하루라도 샤워를 거스른 적이 없고 체중에 신경 쓰며 좋은 체취가 날 수 있는 바디제품들을 골라 쓴다. 퇴근하고 들어오는 그가 매일 반가워 언제나 뛰어가서 안아주고 내 장난기를 좋아하는 그에 엉덩이를 튕겨주며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닌다. 내가 그로 인해 느끼는 행복을 그 역시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부부싸움을 안 한 지 몇 해가 지나고 있다. 제주로 이주하면서 우린 둘이 더 똘똘 뭉치게 되었고 삶을 사랑함과 동시에 서로를 더 사랑해주고 있다. 특별하게 뭔가를 하거나 말로 표현하진 않지만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보듬어주고 수많은 대화를 한다. 그의 눈빛만 봐도 그의 생각이나 걱정거리 기쁨등이 마음에 와닿고 그 역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얼마 전 2층 테라스에서 집 앞 들판을 뛰노는 근육질 빵빵한 말님들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포비야, 우리 다시 태어나면 저 꿩으로 태어나자.”

(집 앞 들판엔 말들도 뛰어놀지만 꿩, 다람쥐, 까치, 개구리, 길냥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왜 꿩으로 태어나고 싶어?”

“볼 때마다 꿩 2마리가 항상 같은자리에서 투닥거리기도 하고 놀기도 하는 게 예뻐서. 그리고 옛날 전통 결혼식 때도 항상 사이좋은 꿩 2마리를 올려놓기도 하잖아.”

“오빠.. 그건 꿩이 아니고 원앙 2마리야...”

“아.. 원앙이었구나.. 뭐가 됐든 이쁘니까 우리 다음엔 꿩으로 태어나서 또 제주에서 같이 살자.”

“그래. 비둘기가 아닌 게 어디야.. 그러자.”     


사람으로 태어나긴 피곤했던 건지 내가 말이 너무 많았던 건지 아무튼 그의 의도는 충분히 느껴졌고 나 역시 다시 태어나도 그를 찾고 싶었다. 이번생에선 내가 그를 먼저 픽했지만 다음생엔 그가 꿩의 깃털을 휘날리며 내게 다가와 멋진 부리로 유혹해 줬으면 좋겠다. 그를 만나 감사하다. 다음 생에 그가 해줄 부리키스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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