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경 작품들
『열다섯에 곰이라니』를 재미있게 읽고 추정경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예전에 읽었던 『내 이름은 망고』를 쓴 작가였다. 작가의 작품은 조금씩 다르지만 특별한 공간과 특이한 소재를 탁월하게 다룬다. 스릴, 미스터리 등 장르적 특성을 잘 살려 쓴 작품이 많았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글을 토대로 책의 내용을 정리했다.
다산책방 | 2022년 12월)
정체불명의 현상으로 갑작스럽게 동물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우여곡절 성장기를 담은 작품이다. 곰이 된 태웅을 비롯해 기린, 비둘기, 하이에나 등 제각기 다른 동물로 변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펼쳐진다. 자신의 성격을 조금씩 품고 있는 동물로 변해 버린 여덟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십 대들의 현실과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가족이 아닌 소중한 존재. 그 첫사랑이 비둘기라니. 이름도 성도 없는, 똥구멍이 웃는 모양인 것만 알고 있는 수컷 비둘기가 첫사랑이라니.
세희는 처음으로 이상한 소원이 생겼다. 그것은 어린 시절 엄마와 아빠가 마법사이길 바랐던 거나,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새 휴대전화가 있었으면 했던 지난날의 소원들과 결이 달랐다.
자신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고, 덩치가 아무 일 없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인 소원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덩치가 조금만 다쳤기를, 다시 우두머리가 될 수 없더라도 무리로 돌아와 예전처럼 자신과 함께하기를 빌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내어줄 것은 내어주어야 하는, 엄마가 말하던 어른들이 소원을 생각하는 법을 따른 순간, 세희는 말랑거리던 제 마음이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63~64쪽)
그러나 세상만사가 늘 그렇듯 일은 예기치 않은 식으로 진행된다. 3학년 중에서 사자로 동물화된 아이가 나타나며 서열 피라미드는 또 한 번 뒤집힌 것이다. 소문에는 그 아이가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엄친아’에 전교 회장이라나.
곰인 태웅은 사자인 엄친아 전교 회장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일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엄친아 사자가 등장해 동물화 세계의 질서를 평정한 이후 학교는 더욱 조용해졌다. 크고 작은 힘겨루기와 대립이 있었지만 점차 잦아들고 제각각의 질서를 찾았다. 힘을 아끼고 절제하는 사자 앞에서 그 누구도 제힘을 꺼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면 동물화도 성적순이었던가.(140쪽)
창비 | 2011년 5월 (제4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어느 날 갑자기 엄마와 함께 낯선 캄보디아에서 살게 된 고등학생 수아, 한국에 있는 아빠 곁으로 돌아가고 싶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관심을 보이는 이웃들은 짜증 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 버린 엄마를 대신해 닷새 동안 관광 가이드 역할을 떠맡고 비슷한 또래인 캄보디아 소녀 쩜빠와 현지 가이드를 하면서 점점 캄보디아에 마음을 연다. 한편 이혼하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줄로 알았던 수아의 아빠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면서, 수아는 엄마가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끝없이 노력했음을 깨닫는다. 수아는 엄마와 자신을 둘러싼 이웃들과 화해하고 캄보디아에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지금은 사원 앞에 있는 연못이 오른쪽은 거의 말랐고 왼쪽에만 약간 물이 고여 있는 정도지만, 우기가 되면 분위기가 진짜 달라요. 그때 오시면 또 다른 앙코르 와트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삼 년 전 아빠는 내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단 한 번 보고 모든것을 다 봤다고 믿진 말라고,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이런 사원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걸 만들어 낸 의지에 있다고.
문득 엄마 역시 관광객들을 데리고 이곳에 올 때마다 아빠가 했던 그 말을 떠올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행복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을 매일 꺼내 보는 엄마의 마음은 슬펐을까 기뻤을까. 잠시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105쪽)
너무 많은 우연과 희망에 기대 살면 사람이 지치는 법이다. 어쩌다 주운 동전 하나 때문에 매일 땅만 보고 걸어다닌다면 애초부터 동전은 행운이 아닌 셈이다.(169쪽)
놀(다산북스) | 2013년 7월
3학년 2반에는 모두가 싫어하지만 겁내는 아이가 있다. 바로 김하균이다. ‘나’도 김하균을 싫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먹을 휘두르던 김하균에 대한 혐오가 폭발하고 교실에서 집단 폭행 사건이 벌어진다. ‘나’를 비롯해 여섯 명의 아이들이 주축이 된 이 사건으로 인해 김하균은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따라간 나는 반 아이들이 모종의 합의를 통해 나를 폭행의 주동자로 교묘히 몰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순간에 가해자로 몰려 학교로도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된 ‘나’는 그 순간 수신자가 없는 메시지를 받는다. “7시 55분까지 한강으로 와.” 꺼림칙한 기분에 한강으로 간 나는 강물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소년을 목격하고 구하겠다며 무작정 강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우연히 한강대교 아래에 숨겨져 있던 비밀스러운 ‘벙커’의 입구를 발견하게 된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벙커. 그곳에서 ‘나’는 미스터리한 소년과 일곱 살 꼬마를 만나고, 두 사람의 도움으로 한 달 기한의 벙커 생활을 시작한다. 그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던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하균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나쁜 놈’ 하균에게 말 못할 아픈 속사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벙커로 몰래 숨어든 김 사장과 김 할아버지가 세 사람의 일상에 끼어들면서 벙커에서의 생활은 점점 더 꼬여만 가고, 메시와 약속한 한 달이 가까워지면서 잊고 싶은 현실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신비한 소년 ‘메시’와 ‘미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구도 본 적 없었던 한강대교 밑 ‘벙커’의 진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심호흡을 하고 물속으로 들어가 다리 근처를 살피던 그때, 반대편 강둑 가까이에서 깜빡이는 오렌지색 불빛이 다시 나타났다. 마치 그 오렌지색 불빛이 내게 그곳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바다 요정 세이렌에게 홀린 듯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곧 눈앞에 커다란 시멘트 기둥이 나타났다. 강물 속에 잠겨 있는 한강 교각의 아랫부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중앙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네모반듯한 모양의 완전한 직사각형 문이었다.(37~38쪽)
다른 사람의 깊숙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더구나 그 상대가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김하균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실은 녀석의 진심을 알고 이해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김하균이 왜 그토록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혔는지 그 깊숙한 속내를 알게 되면 그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될까 봐 거부감이 들었다. 어쨌든 김하균이란 녀석을 그렇고 그런 ‘나쁜 놈’으로 기억하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그 사람을 알기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함정이 숨어 있다.(101~102쪽)
메시의 고함 소리에 벽이 흔들리며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사이 미노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고 벙커의 벽은 마치 살아 숨 쉬듯 꿈틀대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벙커가 크게 휘청대는 그 순간 2층 해치까지 왈칵 강물이 솟구쳐 올랐다. 왈칵왈칵 피를 토하듯 해치가 강물을 뿜어 대자 벙커가 형체를 잃고 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처가 난 벙커의 벽면이 꼭 사람의 생살같이 퉁퉁 부어오르며 벌겋게 피를 흘리는 광경을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188쪽)
나는 세상 사람들이 부럽다고 말하는 열여섯 살이다.
세상을 다 주고도 가질 수 없는 찬란한 열여섯인데 지금 내 심장은 반환점을 찍고 돌아가는 마라토너처럼 지쳐 주저앉고만 싶다. 이렇게 의미 없이 살다간 앞으로도 내가 살아온 삶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힘들 거라는 걸 아는 열여섯의 마라토너이다. (229~230쪽)
돌베개 | 2017년 5월
‘온다정’과 언니 ‘온서정’, 막내 ‘온수정’ 세 자매가 산 지 어느새 3년. 그사이에 자매를 돌봐 주던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부모는 그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겨우 아홉 살, 열여덟 살, 열아홉 살인 세 자매에게 당면한 문제는 생존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돈나무 공동체’가 서정의 후원자로 나서고, 서정은 무사히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가고, 다정과 수정은 돈나무 공동체의 주민으로 초대받는다.
‘돈나무 공동체’는 게젤과 슈타이너의 정신을 토대로 세워진 마을이다. 이들이 쓰는 감가화폐의 이름은 ‘재노시’인데, 돈의 가장 큰 존재 목적인 ‘재화와 노동과 시간을 교환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다정과 수정이 이곳에 도착한다. 하지만 세 자매가 당도한 새로운 세계도 완전무결하지 않다. 대안을 꿈꾸며 힘겹게 쌓아 올렸던 세계는 어느 날 처절하게 무너지고, 이제 세 자매는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현실에서 다시 시작한다.
여름에는 찜통 같은 더위와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 얼어 버려 똥탑이 쌓이는 공동 화장실까지 무엇 하나 사는 게 녹록하지 않은 이곳에서 가난을 배웠다. 돈이 없다는 건 그저 불편함일 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은 그 말을 듣는 그 순간까지였고 현실 속 가난의 불편함은 유통 기한이 긴 참치 통조림 같았다. 개봉하기 전까지는 부패하지 않는 상식. 그러나 뚜껑을 열고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썩기 시작하는 건 가난과 통조림 속 참치가 똑같다. 가난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언니의 말이었다.(13~14쪽)
“돈이 나무에 주렁주렁 열릴 만치 돈이 많아서 그래 지은 기 아이라 거기서는 돈이 나무처럼 자라다가 때가 되믄 열매를 맺고 이파리도 떨자 뿌고 장작도 되고 다시 재가 돼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캐서 돈나무란다. 돈이 늙어 가는 곳이라데. 희한하제?”(29쪽)
˝차주 입장에서 커다란 화물차를 빌려주면 차량 렌트비를 벌지만, 그 차 자체가 화물이 되어 버리면 화물 보관료를 내야하는 거지. 화물차라는 돈이 투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굴러가지 않는다면 화물차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거니까. 조만간 마이너스 성장 시대를 맞게 되면 신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론으로 번지겠지.˝(62쪽)
˝얼리어답터가 신기술 발전의 선두 주자라는 거 아니? 계속 새로운 걸 쓰고 시도해야 기술력도 발전하는 거야.˝
그 말에 효준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 아세요? 죽은 고래의 배 속을 갈라 보면 그 속에 엄청난 플라스틱 쓰레기가 들어 있는 거.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계속 무분별하게 만들어 내기만 하고 소비하는 지금 세대는 인류 최악의 세대라는 건요? 그런 물질적 풍요를 누려 온 건 아저씨 다음 세대인 우리와 까마득한 아래 세대가 누릴 권리를 대출받아 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요?˝(217쪽)
돌베개 | 2022년 7월
전도유망한 스타트업 대표인 목훈은 첨단 기술을 도입한 VR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던 중 해커 ‘반타 블랙’의 예상치 못한 개입으로 목훈과 팀원들은 위기를 맞는다. 그 와중에 의료용 재활 VR 프로그램을 구매하기로 한 병원의 함 회장은 목훈에게 실감 나는 멸치잡이 VR을 개발해 달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주문을 한다.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인 함 회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던 목훈은 그 과정에서 뜻밖에 평생 원망하던 아버지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는데……. 목훈의 프로그램에 잠입한 반타 블랙의 정체는 과연 누구일까? 함 회장이 왜 목훈을 거친 바다의 배 위로 보냈을까?
어쩌면 이해한다는 것은 힘겹게 에베레스트 봉우리를 오르는 일이 아니라 심해의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말하는 ‘이해‘의 진짜 속뜻은 ‘너의 상황은 알지만 너의 감정의 깊이는 모르겠다‘에 가깝다.(120쪽)
발전에는 필히 느린 구간이 필요했다. 스스로 사유하고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하는 단계를 지웅이 건너뛰게 만든 셈이었다. 그래서 지웅은 반타 블랙이 되어 목훈의 프로그램을 저지코자 했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랬으니.(196쪽)
다산책방 | 2019년 1월
유소년 테니스계의 유망주라 칭송받던 십팔 세 소년 임석. 그는 어느 날 스폰서의 초대를 받아 비밀에 싸인 별장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 후 눈을 떠보니 병실이었고, 삭제된 기억 속에서 어느새 임석은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차에 치인 동갑내기 김유진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황. 형사 처분을 받게 되면 테니스 선수로서의 인생은 끝장난다. 어떻게든 누명을 벗고자 단서를 모아보지만, 네비게이션도 길을 표시하지 않는 별장까지의 경로에는 CCTV 기록이 모두 지워져 있었고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친구들은 임석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감별소에 갇혀 있는 동안 수없이 헤아려도 도무지 밝아지지 않는 깜깜한 기억, 실낱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 때 임석에게 변호사 임지선이 찾아온다.
한때는 세상의 중심에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소년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동안 켜켜이 가려져 있던 추하고 고린내 나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절대악과 맞닥뜨렸음에도 외면하고 도망쳤던 과거와 달리 이제부터 그는 어둠 속으로 달려들어야만 한다.
어스름한 빛이 내리비치는 그들의 세계에 농도가 다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오라고.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내게 말했다.(328쪽)
“주저앉지 마. 넌 시작도 안 했어. 끝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너라고! 십 년? 개수작 말라고 해.”
돌베개 | 2020년 7월
분기별 ‘등급 시험’을 통해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정보 등급이 부여된 20××년 대한민국. 법이 시행된 지 10여 년 만에 정보 등급은 계급 고착화로 귀결되고, 인구의 5%에 불과한 7, 8, 9등급이 부의 95%를 소유하고 있다. ‘9등급 정보보호법’이 실행된 표면적인 이유는 가짜 뉴스와 혐오 표현 차단이지만, 진짜 목적은 5%의 특권을 공고히 하고 불평등을 눈가림하는 데 있다. 열여덟 살 소년 ‘이휘강’이 재개발 지역 아이들에게 허가 없이 작문을 가르친 죄로 ‘AI 재판’에 회부된다.
AI 판사는 중형을 선고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뜨리고, 휘강에게 ‘15도서관 720시간 자원봉사’를 명령한다. 법전과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로 정평 난 AI 판사는 왜 이렇듯 가벼운 형을 휘강에게 선고한 것일까? 세간의 수군거림대로 AI 판사에게 오류가 생기거나 해커가 개입한 것일까?
휘강이 15도서관에 도착하면서 의문은 증폭된다. ‘정보 불평등’에 대한 눈가림으로 시행 중인 ‘사람책’ 프로그램,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요일별로 등장하는 마법사·정신과 의사·승려·일용직 노동자·살인자·피아니스트 등의 여섯 가지 사람책, 대중들의 히스테릭한 열광 속에서 슈퍼스타로 떠오른 연쇄 살인범이자 소설가이자 금요일의 사람책 오태중, 오태중의 자전적인 소설 『나와 살인, 그리고 히아신스』……. 휘강과 친구들의 활약으로 의문의 책과 살인 사건에 얽힌 비밀들이 한 꺼풀씩 벗겨지지만, 비밀 뒤에는 더 거대한 비밀, 음모 뒤에는 더 잔혹한 음모가 은폐되어 있다.
오태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서관이란 해부된 뇌의 전시장. 소름 돋지만 와닿는 표현이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알지 못하는 신의 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도 싶을 만큼 인간의 정수가 저장되어 있다.
책을 꺼내 읽는 이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그들이 누리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빼앗겨 버린 권리이자 인류의 유산임에도. 그 생각에 잠겨 오래도록 사다리에 매달려 있었다.(91쪽)
인류의 지식은 모든 인류의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홀로 소유할 수 없고 가둘 수 없으며 값을 매길 수 없다. 생각을 댐 안에 가두면 장고 끝의 죽음뿐이다. 난생은 제 부리와 발톱으로 껍질을 깨지만 인간은 누군가 그 막을 찢어 주어야 하는 태생이니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벗겨 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멍게가 아니냐. 정착하여 자신의 뇌를 먹이로 쓰며 생을 갉아먹는 그 멍게와 무엇이 다르냐.(262쪽)
다산책방 | 2021년 8월
배경이 되는 공간은 강원도 정선 인근.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인 동시에 가상의 세계이다. 잠깐의 유흥과 인생의 실패 사이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흐려 거대한 산업이 된 카지노와, 그곳에 중독된 자들의 미래를 후려쳐 생계를 잇는 전당포 사람들. 정상과 비정상, 합법과 불법이 복잡하게 얽힌 곳. 만약 초능력자들이 숨어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과거는 묻지 않고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가득한 이곳이야말로 그 어디보다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년 장진은 자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무심함과 엄격함 사이를 제멋대로 오가는 아버지와 어느 날 나타난 새어머니 밑에서 반쯤 방임당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꾸준히 두들겨 맞고 치료할 수 없는 기면증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살았을 뿐이다. 알고 보니 그의 병은 그 누구보다 빼어난 초능력을 억지로 억누른 결과였지만 마침내 고개를 든 그 능력은 인생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보다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큰 위협에 처하게 만든다.
“내가 보기에 그건…… 칼이다. 아주 예리하고 위험한 칼. 어떤 사람은 공간을 이동하는 데 쓰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베는 데 쓸 거고. 그 둘의 차이는 크지. 이해 가냐.”
“사람을…… 죽여요.”
“칼은 네 손에 쥐어져 있는데 스스로 조절하지는 못하니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까 여긴 너든 네가 벤 사람이든 피를 흘린 날 와야 하는 곳인 거고.”(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