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결국은 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사와동화 May 09. 2024

사라지지 않아

채은랑, 연여름, 김두경, 존 프럼, 이새벽, 나현 사계절 23. 12



사라지지 않아 - 제8, 9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

채은랑, 연여름, 김두경, 존 프럼, 이새벽, 나현 (지은이)  | 212쪽 | 사계절 2023년 12월


제8·9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 작품집
『사라지지 않아』 6인 6색 작가 인터뷰


“제가 만든 행성에서 파도가 치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아요”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 작품집은 지금 과학소설가들이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입니다. 『사라지지 않아』 참여 작가들은 삭제를 앞둔 게임 속이나 불행 측정이 가능한 시대, 누구도 죽지 않는 시대의 저승 차사 앞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 낯설고 흥미로운 세계에 막 진입할 독자를 위해, 참여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아』 채은랑


「사라지지 않아」 속 ‘행성 꾸미기’ 게임의 플레이어라면, 작가님의 행성에는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요?


커다란 바다부터 하나 만들고 시작할래요. 지구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바다거든요. 바다를 보러 늘 먼 곳으로 떠나곤 하는데, 제 행성에 바다가 생긴다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요. 제가 만든 행성에서 파도가 치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 해질 것 같아요.


『하얀 파도』 채은랑


「하얀 파도」 속 세계의 관리자들처럼 작가님에게도 이 세계의 무언가를 삭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무엇을 삭제할 건가요?


이거 정말 어렵네요. 저는 ‘상처’를 삭제하고 싶어요. 사람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사라지면 조금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복도에서 기다릴 테니까」 연여름


「복도에서 기다릴 테니까」 속 가상현실 학교 ‘소나’에 다니는 중학생이었다면, 무엇 이 가장 즐겁고 무엇이 가장 어려웠을까요?


소나 시스템에서는 겉모습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게 가장 편하고 좋을 것 같아요. 무엇을 어떻게 입을지, 머리를 어떻게 할지 등등 생각하고 실행하는 데도 제법 품이 들잖아요. 그런데 로그인만 제때 한다면 세수 안 하고 머리가 뻗친 채로도…. 당당하게 등교 할 수 있다는 점은 단연 최고 아닐까요. 가장 어려운 점은 그래도 ‘어딘가를 오가는 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등굣길 하굣길이 없다는 거요. 저는 학교 가는 길,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음악을 들으며 걷거나, 친구와 수다 떨기를 좋아해서 지름길을 놔두고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기도 했거든요. 그런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은 소나 시스템의 치명적인 약점 같아요.



「나의 메신저 버씨」 김두경


「나의 메신저 버씨」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과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버씨는 귀를 기울이지만.”


누구나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말을 하고픈 욕구가 앞서기 마련이죠. 그런 내 말에, 그 것도 언제든 무슨 말에든 귀 기울이는 이가 있다면 어떨까요? 이 순간 주인공 이레는 알 고 있었을 거예요. 버씨와 이미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요. 나는 과연 귀 기울여 들어 주는 친구인지 한번 되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우르수스 행성 대족장 취임 46주년 기념 선물에 대하여」 존 프럼


멜빵바지를 입은 콧수염 배관공 아저씨가 등장하는 게임을 모티프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콧수염 배관공이 활약하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야말로, 안전한 실패를 연습케 하는 비디오 게임의 긍정적 효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게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만든 미야모토 시게루라는 개발자는 밥상 뒤집기를 하며 게임을 만든다고 하는데, 무수한 시행착오와 크고 작은 실패를 거듭하며 제작에 임했기에,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불행 소녀」 이새벽


불행을 선택하는 대신 미래를 보장해 주는 불행특기자 전형이 있습니다. 선택하시겠습니까?


불행특기자 제도의 가장 어려운 점은 남의 불행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차라리 쉬운 일이죠. 정말로 어려운 점은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증명하고 남들에게 내보이며 평 가받아야 함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불행특기자가 되고 말고는 선 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예요. 살 수 있는 길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길을 걷는 것을 선택이라고 말해선 안 될 테니까요.



「마지막 차사와 혼」 나현


만약 작가님이 작품 속 휴머노이드라면,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로 소멸하는 것과 모든 기억을 포맷하더라도 존재하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할 건가요?


둘 다 의미가 있을 거예요. 방식과 의미는 다를지라도 계속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한 가지 고른다면 (미래의 저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요. 지금과 전혀 다른 존재이자, 그들을 사랑한 적 없는 ‘나’여도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니 분명 제가 다시 사랑하게 될 겁니다.

『사라지지 않아』 6인 6색 작가 인터뷰 (sakyejul.net)



출판사 제공 책소개  


현실과 비현실에서 ‘삭제’가 가지는 의미


「사라지지 않아」는 게임 캐릭터인 ‘나’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자기 행성을 꾸미는 힐링 게임인데도 나를 만든 플레이어인 ‘현지’는 언제나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3년 전, 공들여 만든 게임 속 우주선이 폭발한 직후부터는 접속하지 않았다. 당신의 캐릭터가 애타게 기다린다는, 이 행성이 영구 삭제되니 백업하라는 시스템 메시지에도 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구 삭제를 2주 앞둔 날, 나의 행성에 불시착한 캐릭터 ‘상아’는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자신의 우주선을 고쳐 주면, 현실에서 현지를 찾아 다시 접속하게 만들겠다고. 상아가 휴면 계정들이 모인 ‘잊힌 자들의 은하’를 여행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에서 우주 정거장 폭발 사고로 행방불명된 친구 ‘예지’를 찾기 위해서다. 작품 초반에 짧게 언급된 게임의 룰이 그 순간 이야기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행성이 통째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만 삭제되는 것은 단 한 경우, 플레이어가 죽었을 때다.’(19쪽) 게임 속에 예지의 캐릭터가 남아 있다면, 먼 우주로 사라진 예지 역시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게임 속을 헤매는 상아의 간절함은 주인공인 ‘나’에게도 그리고 독자에게도 오롯이 전달된다. 게임에서 캐릭터를 만들고, 열심히 가꾸다, 시들해지면 그만두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일이다. 「사라지지 않아」를 쓴 채은랑 작가는 잊힌 게임이라는 가상현실 속 존재와 현실의 존재를 촘촘하게 연결하며,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반드시 있으리라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수상 작가의 신작 「하얀 파도」 역시 ‘데이터’ 삭제를 화두로 삼는다. 시스템이 세상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도시’의 고등학생 재아에게 갑자기 사라지는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달력 속 16일, 텔레비전 화면 속 아이돌, 1학년 3반 교실, 달리던 버스, 그리고 언니의 방. 사라진 존재 대신 자리한 ‘하얀 공백’은 오직 재아에게만 보이고, 그들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조차 다른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다섯 살 차이이지만 생일이 같은 자매는 시스템의 ‘작은 버그’라고 불렸다. 재아는 도시의 시스템 관리자로 일하던 언니의 흔적을 따라 사라진 존재들을 찾아간다. 방대해진 데이터를 어떻게 관리하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는 이 시대에 「하얀 파도」는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읽힌다. 개인부터 사건까지, 모든 존재가 ‘데이터’라 불리는 지금 ‘무엇을 삭제할 것인가’ 하는 판단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을까? 이른바 안전이나 효율 같은 획일적인 기준이 인간성 위에 존재하는 순간, 우리가 잃어버릴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가상현실이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제8회 한낙원과학소설상 가작을 수상한 「복도에서 기다릴 테니까」(연여름 글)와 「나의 메신저 버씨」(김두경 글)는 비대면 수업이 당연해진 시대에 어린이청소년의 관계 문제에 주목한다. 「복도에서 기다릴 테니까」는 학교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관계가 ‘소나’라는 가상현실 안에서 이뤄진다. 수업이 시작할 때 로그인하지 않으면 가상 교실에서 의자가 사라진다. 쿠폰 열 장을 의자 한 개와 맞바꿀 수 있지만, 준희에게는 아홉 장뿐이다. 한 장을 빌려줄 친구가 없어서, 뒤늦게 로그인한 준희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소나 시스템은 소통할 ‘소(疎)’에 나 자신을 가리키는 ‘나’를 써서 차별 없고 안전한 학교 교육을 표방해 만들어졌지만, 그 명칭은 준희에게 큰 의미가 없다. ‘절친 하나 없는 처지에 소통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어울린 적 없었다.’(72쪽) 괴롭히는 아이는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친구도 없는 준희에게 처음으로 쿠폰을 주고 싶은 아이가 생겨날까? 「나의 메신저 버씨」는 비대면 시대에 아이들의 사회성 발달과 정서 함양을 위해, 교육부가 개발한 메신저를 소재로 삼는다. 체험 학습 시간에나 친구를 실제로 만날 수 있으니, 사람과 똑같이 생긴 아바타 메신저가 친구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런데 인간의 공감 능력을 학습하도록 개발된 인공지능 메신저가 정말로 아이들의 친구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주인공 이레와 메신저 버씨 간에는 새로운 관계가 맺어진다.


긴긴 팬데믹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별안간 비대면 교육 현장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준비 없이 맞닥뜨린 ‘미래’는, 언젠가 새로운 기술이 대면 관계를 대신하게 될 거라던 막연한 상상을 조금 더 현실에 가깝게 만들었다. 제8회 한낙원과학소설상 가작을 수상한 두 작품은, 모두 그러한 시대의 결과물이다. 가상현실 속 관계는 정말로 안전할까? 폭력이나 차별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상현실 속 관계가 허상이라고 낮잡을 수 있을까? 두 작품은 이 의문들과 동시에 한 가지 명확한 희망을 제시한다. 기술로 인해 가능해진 비대면 관계에서 결국 ‘소통’의 열쇠를 쥔 것이 바로 당사자인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힘을 빌린 다채로운 이야기와 소중한 질문들


현실의 모든 불행을 수치로 예측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그래서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누군가 불행을 선택할 수 있다면 ‘불행 특기자 제도’는 온당한 일일까?(「절대 불행 소녀」, 이새벽 글) 우주 교역이 활발한 시대, 자원의 핵심 생산지인 우르수스 행성 대족장에게 가장 안전한 실패를 알려 준 것이 바로 지구의 비디오 게임이라면?(「우르수스 행성 대족장 취임 46주년 기념 선물에 대하여」, 존 프럼 글) 과학은 물론 의료 기술의 발달로 누구도 죽지 않는 시대가 도래해, 인간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할 저승 차사가 사양 산업이 되어 버린 미래. 저승의 마지막 차사가 골목에서 길 잃은 혼을 맞닥뜨린다면?(「마지막 차사와 혼」, 나현 글)


올해 10회를 맞은 한낙원과학소설상은 해마다 동시대 과학소설가들이 가진 가장 날것의 상상력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독자들에게 전해 왔다. 제8, 9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에 수록된 과학소설들 역시 독자들에게 ‘미지의 세계’를 보여 주기보다는, 작가들이 먼저 가 본 미래에서 만나고, 경험하고, 상상한 존재들, 그리고 그 만남에서 얻은 질문들이 담겨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다섯에 곰이라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