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중반에 시간이 멈춰버린 공산주의 국가
(2016년 개인 SNS에 작성해 올렸던 것을 브런치에 가져와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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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 서쪽 외곽에 있는 호텔에 머무는 중이다. 아무리 쿠바라도 그렇지 수건에는 담배 냄새가 깊게 배어있고 에어컨은 켜지지도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4개 중 3개가 작동을 하지 않아 모든 층의 사람들이 한참을 기다렸다가 하나에 낑겨 타느라 고생을 하고 있다. 이 정도로 관리 안 되는 숙박업소가 하루 50꾹(CUC)을 받고 어엿이 영업을 하고 있다니….
원래 오늘 밤 시내에서 그 유명한 ‘아프로 쿠반 재즈(Afro-Cuban Jazz)’를 들을 예정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에 좌절하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방ㅡ아무리 정을 붙이려고 해도 무엇이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한ㅡ에 들어와 엎드려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처음 쿠바라는 나라를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시간표를 고르게 짜는 것에 실패해 야간 수업을 하나 신청해야 했고 개중 만만해 보이는 "문화인류학" 수업에 들어갔다. 일반적인 대학 교수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던 교수 K는, 자신을 비롯한 다양한 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물과 모험적인 삶을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원체 딴 세상 이야기에 관심이 많던 나 같은 학생은 늦은 밤까지 진행되는 그 수업이 한시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하루는 K 교수가 ‘시간의 춤’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틀어주었다. 그 영화는 100년 전 애니깽(Henequen) 노동자로 팔려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쿠바에 정착하게 된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조선인 부모와 조부모가 부르던 애국가를 기억해내 카메라 앞에서 흥얼거리던 후손들의 모습이 머릿속 깊이 박혔다.
2016년.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미국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느라 매일같이 끙끙대고 있을 무렵, 뉴스를 통해 체 게바라의 벗이자 쿠바의 통치자였던 피델 카스트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미국 매체들은 당시 이 소식을 상당히 크게 다루었다) 1년 전 쿠바에는 미국 대사관이 설립되었고, 두 나라는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 수립을 위한 협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점이었다. 금수조치(embargo)가 풀리면 미국의 자본과 시스템은 쿠바에 빠르게 유입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나는, 팔자에도 없던 미동부 한적한 곳에 위치한 대학원에서 논문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살다 보면 무작위적인 사건들이 묘하게 연결되면서 마치 나에게 어떤 행동을 주문하듯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다 곧, 뉴욕의 JFK와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항을 잇는 직항 노선이 개통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쿠바는 이제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서너 시간만 가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되어있었다.
인생의 무수한 선택지들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도 하는 법이지만, 가까워진 것은 가까워졌을 때 확실하게 움켜잡아야 함을, 나이를 먹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수업에서 스크린을 통해 본 쿠바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풍경들이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기 전에..
학기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불과 며칠 뒤 그렇게 나는 평화로운 아바나의 말레꼰(Malecon) 부둣가를 걷게 되었다. 길 건너편에서 10~14세 정도의 아이들이 누가 봐도 관광객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 한 소년이, 얼핏 보기엔 평범한 남미 여자아이로 보이는 한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Ella es coreana! (얘는 코리안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낯선 장소에서,
곧 눈이 마주친 그 여자아이의 입에서 내게 가장 익숙한 인사말이 또렷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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