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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 Oct 28. 2023

어머님은 '쑥버무리'가 싫다고 하셨지

쑥버무리


겨울이 길면 봄은 더디 오는 것 같다.


훈훈해졌다 싶은 날씨에 폭삭 속았다.

얇게 입은 옷자락에 몸이 으슬으슬하다.

코끝이 시큰거리다 재채기 한번 하고 나면 한기가 확 든다. 오죽하면 가만있는 꽃을 시샘한다 하여, '꽃샘추위'라고 할까. 추울 때 춥더라도 꽃은 건들지 마라.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봄나물이다.

냉이는 땅기운 듬뿍 머금고 있어 향만 맡아도 배가 부른 것 같다.

따듯한 햇살이 퍼지면 하나 둘 올라온 냉이를 살살살 캐낸다. 흙을 털어내고 뿌리부터 살짝 다듬어 모은다.


냉이와 함께 쑥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나지막한 푸른 국화와 쑥이 헷갈렸다. 아마 향 때문이었나 보다. 국화꽃잎을 딸 때면 꼭 봄에 캐는 쑥 같았다.


봄이면 쑥국과 냉잇국은 꼭 먹어줘야 한다.

그래야 봄을 봄답게 보낼 수 있고 쑥국 한 그릇 먹지 않고 여름 맞이하기엔 봄쑥이 너무도 싱그럽다.




쑥으로 만든 음식의 대표주자는 단연 쑥절편이다.

긴 가락으로 넓적하게 뽑아 일정 간격으로 '福'이라고 찍어낸다.

절편을 먹고 나면 온 세상 복은 다 내가 먹을 수 있겠지. 어릴 적에는 그 '福'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절편 한 되 만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 한 양의 쑥이 필요하다.

요즘 떡집에서 이만 원 면 아주 맛있는 쑥절편 한 되 산다. 그렇게 사온 절편은 기분 탓인지 정말 함량 부족인지 쑥맛이 별로 안나는 것 같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끝난 어느 해 봄.

바닷가 옆 양지바른 언덕배기로 쑥을 캐러 갔다. 작은 과도 하나와 에코백 하나 메고 슬렁슬렁 걸었다.

햇살이 퍼져 훈훈한 바람이 귓가를 간질간질 지나갔다.

밟고 선 자리부터 온 천지가 쑥이었다. 우악스럽게 욕심 내지 않아도 보드라운 쑥은 뚝뚝 잘 끊겼다. 에코백이 가득 찰 만큼 밥 때도 놓치고 쑥을 담고 나니 등이 따듯했다.

엄마가 살살 등을 쓸어 주던 것처럼 온기가 가득 담겼다.


 수압 샤워로 씻어내지 않고 물에 담근 쑥을 살살살 흔들어 씻어 낸다.

깨끗이 씻어야 흙 없이 향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잘 씻은 쑥은 물기를 털어 채반에 잘 받쳐 놓는다.

눌러 담은 쑥은 씻는 것만으로도 시간도 손도 많이 간다.


쑥 한 줌 위에 쌀가루를 살살살 뿌려 본다.


살짝 물기를 머금은 쑥은 하얀 쌀옷을 입는다.

물기가 쌀가루를 머금으며 엉겨 붙는다.

물이 팔팔 끓는 찜기 위에 쌀가루 입은 쑥을 한 꼬집 크기로 올려 둔다. 한 김 나기 시작하면 쑥향 가득이다.

그렇게 쑥버무리를 만든다. 따뜻할 때 호호 불어 한입거리 입 속에 넣는다. 씹히는 맛도 있고 배어 나오는 향에 코 끝까지 봄봄 한다.




어머님은 겨울이 끝날 무렵, 햇살 온기가 바뀌었다 싶으면 바로 봄나물을 캐러 나섰다.

내 눈엔 미처 보이지도 않는 봄나물을 한정 없이 캐냈다. 옆에서 보고 있는데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손 빠르게 나물을 손에 넣었다. 쑥 한 가마니, 냉이 한 바가지는 반나절이면 금방이었다. 내겐 추억이고 별미인 쑥버무리를 가족들에게는 먹으라 하면서 정작 본인은 절대 먹지 않았다.


“어머님 같이 먹어요.”

“나는 버무리 안 먹으련다. 떡을 해서 먹지.”

“왜요?”

“징글징글하다. 그 나물덩어리”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독스러운 겨울이었단다.

살을 베어내는 듯한 추위 속 햇살만 조금 퍼지면 먹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단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쓸어 담고 온다. 지천지 돋아난 쑥을 들고 와 대충 밀가루와 버무려 쪄낸다. 먹을 쌀도 없는데 쌀가루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쑥버무리는 먹기 싫어도 먹을 수밖에 없고 먹어야 할 음식이었던 것이다.


찹쌀과 맵쌀 조금 섞어 정성스럽게 씻는다. 씻은 쌀을 불리며 정성으로 쑥을 씻어 보드라운 이파리 모아 탈탈 털었다. 하루 반나절 불린 쌀은 물기를 빼고 쑥과 함께 떡방으로 간다.


희멀건 쑥버무리 말고 찰지고 묵직한 쑥떡 한 되를 김이 펄펄 날 때 뽑아 온다. 먹기 좋게 잘라 이쁜 접시에 담고 국화차도 한잔 만든다. 어머님과 마주 앉아 쑥떡 한 조각 함께 먹는다.


“맛있으세요?”

“그럼 돈 주고 이렇게 정성을 들였는데 맛이 없겠나?”

그냥 고맙다고 하시지.

투박하고 쑥스러운 어머님 대답이 찰진 쑥떡과 닮았고, 왠지는 모르지만 살포시 두 손으로 받아 들어야 할 것만 같은 쑥버무리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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