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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빈 Aug 17. 2023

선지자의 딜레마를 얇게 저민 영화 '오펜하이머'

파멸과 필멸의 상관관계

지난 16일, 나는 전날 개봉한 <오펜하이머>를 보기 위해 근처 아이맥스 상영관을 찾았다.


극 성수기를 피해 다들 눈치싸움을 했던 탓인지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극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양 옆에 사람을 끼고 영화를 보는 게 오랜만이었던 나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상기됐다.


이윽고 영화는 시작되었고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은 그 날 내린 소나기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고,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주는 여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몇 가지 일정을 끝낸 다음 나는 감상했던 <오펜하이머>를 곱씹어 보았다.


영화의 구조나 내용은 어떠했는지, 영화를 본 나는 어땠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극적 피로를 유발하는 영화"


오펜하이머는 시작부터 휘몰아쳤다. (약 스포일러)

보통 일반 영화가 '기-승-전-결' 방식으로 플롯이 구성된다면, 오펜하이머는 '전-결-전-결' 구조로 플롯이 구성되어 시작부터 끝까지 나를 압박했다.


이를 느낄 수 있었던 요소는 다양했다. 


영화의 러닝타임 1/3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인 루이스 스트로스의 욕망이 드러나는 흑백 시퀀스가 오펜하이머의 서사 중간중간에 병치되어 시선의 집중을 유도했다던지, 유명한 일화인 블래킷 교수 암살 시도 장면에서 활용했던 서스펜스 연출, 오펜하이머의 상상이 머릿속에서 가시화되는 장면, 쏟아지는 대사와, 셀 수 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 반복되는 악천후까지 시선이 화면을 떠날 틈을 주지 않았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러닝타임 내내 나오는 배경음악은 영상보다 돋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동떨어져있는 느낌을 주지 않는데, 마치 옆집이나 윗집에서 나는 소음같이 집중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경계에서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그렇게 나는 시종일관 교차되는 플롯 속에서 나란히 구보(驅步-run)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과 서사에 최면됐다.

그 최면이 풀리는 순간은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장면이었다.


전-결-전-결 속에서도 줄거리는 '트리니티 실험'이라는 정상을 위해 나아갔다. 영화 속에서 세어지는 카운트와 함께 고조되는 분위기 끝에서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을 알리는 폭발음은 한 발짝 늦게 들린다. 당연하게도 바로 들려야 하는 폭발음이 한 템포 늦게 들리면서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며 걸렸던 최면이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뱉는 순간, 뒤늦게 들리는 폭발음에 카타르시스는 배가되어 전해졌다.

이때부터 풀리는 긴장감에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영화는 다시 현재시점으로 돌아와서 후반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정치싸움이 벌여지는데. (싸움이라기보다는 스트로스의  일방적 린치에 가깝다.)


이때 나는 영화의 호흡을 따라가며 느낀 피로를 통해 오펜하이머가 겪는 정신적 피로감을 공감하게 되었다.


영화는 초반에 나왔던 에디슨과 오펜하이머의 비밀 대화의 내용이 공개되며 마무리되었다.


<오펜하이머>는 관객의 몰입을 극한으로 끌어낸다.

이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이 전기물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전기물은 장르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다른 장르의 팝콘 무비에 비해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부족하다.


따라서 전기물은 비교적 감독의 디렉팅을 많이 타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내가 유일하게 극장에서 보다 잠든 영화 장르가 전기물이다. 해당 영화는 천재 암호 해독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모튼 틸덤의 손꼽히는 수작이다.

내가 잠든 것은 영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내 몹쓸 컨디션이 모튼 틸덤이 전기물을 이끌어가는 방식과 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추후 넷플릭스에서 다시 본 <이미테이션 게임>은 재미있었다.)


모튼 틸덤이 이미테이션 게임을 통해 앨런 튜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직렬상에 배치해 묵직하게 드러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시간적 시점에 따라 서사를 병렬적으로 배치해 플롯을 잘게 쪼갰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오펜하이머> 전기물이라는 장르를 스릴 있게, 역동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사상 갈등과 윤리적 딜레마의 결합"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만큼 '사상 갈등'이 <오펜하이머>라는 영화의 중추 신경을 담당했다. 통찰력 있는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가 붕괴될 것이라는 것을 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그의 출생 신분과, 주변인들이 그를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몰아갔다. 따라서 그는 영화의 끝까지 사상을 검증받게 되며 몰락한다. 그런데 사상적 갈등만이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선악과를 베어 물면서 시작한 오펜하이머의 윤리적 딜레마는 영화의 배경음과 함께 서서히 증폭되었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라디오를 통해 히로시마 폭탄 투하 소식을 듣게 된 장면에서 더욱 세밀하게 느낄 수 있는데, 관객은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소식을 오펜하이머와 같이 접하게 된다. 따라서 나 역시 이를 통해 오펜하이머가 느끼는 심리적 요동을 더욱 가까이서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막바지에는 유대인 출신인 그의 사상과 윤리적 딜레마가 결합해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이 과정에서 그의 부인인 키티가 수도 없이 맞서 싸우라고 일갈하지만 오히려 오펜하이머는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오펜하이머가 책략이 부족해서도, 싸울 힘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원자폭탄이라는 파멸의 병기를 만들었다는 책임이 곧 필멸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마지막 장면인 아인슈타인의 대화에서 느낄 수 있는데, 영화 끝에서는 초반에 나왔던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 장면이 한번 더 나오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파별의 책임이 곧 필멸이라는 것을 예견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선지자의 딜레마를 얇게 저민 영화"



나는 <오펜하이머>를 위와 같이 정리하려고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기물은 놀랄 만큼 정교했다.

놀란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리학 정보, 인물관의 갈등, 사상 대립, 개연성을 병렬적으로 잘게 저민 플롯을 배경지식 없이도 이해가 가능하도록 잘게 저몄고, 스프링처럼 배치해 오므려서 봤을 때 완벽한 스토리가 되도록 구성해 절대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오펜하이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잘 봤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영화다. 


관객들은 영화를 따라가느라 다한 노력을 관람 후 기쁨과 성취로 치환해 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오래간만에 노력하며 봤던 영화에 아직까지 기쁜 사유를 느끼고 있다.


앞으로 놀란의 영화가 얼마나 더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관객 노력형 영화가 꾸준히 생산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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