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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kki Aug 07. 2018

영원히 철들지 않을 제제가 많길 바라며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서

살다 보면 어떤 감정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조우하길 바라는.

울다 지쳐 잠든 어린 나를 가만히 내려다 보고, 머리를 쓰다듬고, 꽈악 안아주고 싶은,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나지막이 속삭여주고 싶은.


자기연민의 감정.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꺼내 들었다.


주인공 제제는 스스로 글을 깨칠 정도로 영민한 꼬마다. 장난질을 좋아하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영락없는 평범한 다섯 살답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난과 삶에 찌든 가족들에게 수시로 폭력에 노출돼 있다. 아이로써 응당 가지는 성질들에 대해 악마가 깃들은 것이라며 비난받고 조그마한 잘못에 혁대로 얻어터지는 조금은 우울한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폭력을 맞이하는 인간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대해 무지한 아이라면 더더욱. 여느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그래서 일정 부분 슬픔과 연민을 담고 있다.




상처는 이겨낼 순 있어도 잊을 순 없다. 결국엔 남는다. 그리고는 먼지가 쌓인 훈장처럼 삶의 구석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킨다. 상흔을 메 만지고 있노라면 나는  자꾸만 열두 살로 돌아간다. 녹음이 짙던 이국 땅에서 겪었던 일들.


어린 나를 반년 간 돌봤던 그녀는 빨간색 루주를 즐겨 발랐다. 때때로 샤넬 향수가 자신의 시그니쳐 향이라는 것을 목청 높여 자랑하곤 했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으레 그 큰 입으로 미소를 짓곤 했는데 이가 얼마나 하얗고 많던지 아직도 그 미소가 뇌리에 선명하다. 남편 혹은 애인을 저 멀리 한국에 떨어뜨려 놓고 와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종종 신경질적이었다.


성질이 극에 달할 때면 나와 자신의 아이들을 때리곤 했다. 물론 내가 더 많이, 자주 맞았다. 맞는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매일 단어 열다섯 개를 선별해 외웠어야 했는데 꾀를 부리고 싶었던 나는 'coffee'를 썼다. 쉬운 단어를 썼다고 맞았다. 밥을 먹었다.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맞았다. 살이 좀 올랐다. 살이 쪘다고 맞았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 말했다. 눈치 주는 거냐며 맞았다.


때리는 걸로 성에 차지 않을 때면 2층에 위치한 구석방에 나를 가두곤 했다. 그녀의 분이 삭힐 때까지 가끔은 그곳에서 몇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다. 시계라곤 없는 곳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건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맞는 이는 본능적으로 안다. 때리는 이가 어떤 심정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지. 때리는 이도 규정할 수 없는 광기와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내뱉는 가시 돋친 말들. 아이들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끊임없는 자책과 지기 비하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제제의 짧은 삶 안, 군데군데 비어있는 순간들을 밍기뉴와의 대화로 채우며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이 눈물겹다. 자신을 진정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뽀르뚜까를 잃었을 때의 그 상실감이란. 나로선 알 길 없는 슬픔이다.



소중한 존재를 잃더라도 함께 나누었던 따뜻하고도 찬란한 그 순간은 영원히 남는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르뚜까,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상처받은 아이에겐 한 명의 뽀르뚜까와 한 그루의 밍기뉴가 필요하다.


영원히 철들지 않을 제제가 많길 바라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8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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