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윤의 해금이야기
빠리 한달 살기
우리나라 우투리는 2005년 프랑스 파리 서쪽 뱅센느 숲 쪽에 자리한 태양극단으로 초정되었다. 이번에는 한달 일정이었다. 태양극단이라면 ‘제방의 북소리’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스킨이 오랫동안 실험적인 연극을 시도해온 전통 있는 극단이다. 태양극단은 2차 세계대전 때 무기 화약고로 쓰인 거대한 창고를 개조해 극장으로 재생시킨 공간에 상주하고 있다.
극장은 콜로세움 경기장처럼 중앙에 마당 형식의 무대를 두고 무대 둘레를 따라 원형으로 객석을 쌓아올린 형태다. 원형 객석 아래에는 분장실과 더불어 극단 단원들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한달동안 객석 아래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연극과 생활이 하나가 되는 삶!
<우투리>는 악사들이 러닝타임 내내 무대 위에 올라 연주 뿐 아니라 때에 따라 무대에서 움직임을 하며 노래를 하기도 한다. 공연에 대한 리액션을 하기도 하고 추임새를 넣기도 하며 극에 개입한다. 하지만 본격 연주무대 만큼 공연에 대한 부담이 강한 것은 아니다. 대학교 3학년 때였으니 콩쿨에 대한 압박감이 심했을 때다. 무대 위에서 마치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선수처럼 실수 없이 최고의 기량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많이 피로한 때였다. 연주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극단 단원의 일원으로 마음 편히 연주하며 무대를 마냥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태양극단에 도착해서 공연 D-day까지 리허설을 했다. 아침엔 극장 키친에서 각자 빵, 우유, 시리얼 등을 먹었고, 오전 리허설 후 다함께 점심식사를 만들어 먹고, 오후 연습 그리고 저녁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와인을 마시며 밤이 늦도록 뒷풀이를 하는 일정이었다. 고된 연습을 마치고 1유로, 2유로 하는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 밤이 이슥해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종종 해금 연주 요청이 들어왔다. “지윤이 해금 한번 들어보자, 와아...” 하는 작은 함성과 함께 해금을 주섬주섬 챙겨왔다. 유재하의 ‘사랑이라는 이유로’를 시작으로 유재하 넘버들을 연주하면 그 밤, 배우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마다의 사랑에 대한 추억을 그리며 마음도 몽글거렸으리라.
태양극단 안에는 본체 건물을 중심으로 작은 캠핑용 밴과 같은 것들과 사람이 거주하는 컨테이너 박스도 있었다. 태양극단 단원들은 이곳에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레바논,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동에서 건너온 난민들이 기거하는 작은 숙소가 공존했다. 우리는 때로 그들이 해주는 중동 음식을 맛보기도 했다. 스페인의 빠예야 비슷한 꾸스꾸스라는 밥 요리. 몹시 짜서 소름 끼칠만한 양고기 요리도 먹었다. 이국적인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낯선 음식을 먹으며 낙타도 떠오르고 지글지글 끓는 사막의 태양도 떠올랐다. 그 태양의 향과 맛은 태양극단의 날들을 소환할 만큼 강렬했다.
리허설을 하고 새로운 극장에 적응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침마다 배우들은 무대를 밟으며 몸을 풀었고, 연출가와 조연출을 비롯한 제작진은 머리를 맞대고 무대 위 새로운 동선을 구상했다. 씬 연습과 전체 연습인 ‘Run’을 반복하며 태양극단 무대에 익숙해져갔다. 드디어 연극제가 개막했다. ‘첫발자국’ 이라는 젊은 연극제였다. 우투리의 연출가 김광림선생님의 제안으로 나는 개막제 오프닝 연주를 하게 되었다.
태양극단은 무기화약고였던 만큼 그곳이 예술로 채워지지 않으면 삭막하고 황량한 공간이다. 전쟁을 위한 공간. 살상을 위한 무기가 수도 없이 들락거리던 곳이다. 이젠 더 이상 인간을 대량살상하고 삶을 폐허로 만들기 위한 의도를 가진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은 태양극단에 의해 새롭게 살아난 공간이었다. 사람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인문에 대한 고민이 스민 연극을 위한 매우 인간적인 공간으로 재탄생 된 것이다.
연극제 개막식, 이 공간은 젊은 연극인들의 열기로 훈훈해졌다. 누군가 축사를 했고 나는 연극제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이 공간에서, 이 자리에서 어떤 음악을 연주해야 할까? 이곳은 자유와 평화의 공간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틀을 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완벽한 연주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음악 안에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한창 연습을 해서 다지고 있던 ‘자진한잎 중 경풍년’이라는 곡의 도입부만 마음에 품고 무대 위에 섰다. 그리고 경풍년의 모티브를 주제로 즉흥적으로 연주를 이어나갔다.
웅성대던 소리는 잦아들고 관객들은 고맙게도 이 낯선 소리에 몰입해주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내 소리에 집중하고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잘하려고 애쓰는 마음 없이 음악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콩쿨에서 완벽하게 발휘하기 위한 경풍년이 아닌 내 마음에 충실한 경풍년을 연주했다. 이미 경풍년이 아니었고 경풍년을 주제로 한 나의 음악이었다. 누구도 나를 평가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금이라는 악기와 바로 지금의 이 음악은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이 유일하다는 생각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콩쿨에 나가 순위를 다퉈야 하고 무대 위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고3때와 마찬가지로 늘 가위눌림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이 경험이 없었다면 음악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영영 잊고 살았을지 모르겠다.
태양극단은 연극예술로서 세계에 자유와 평화, 사랑을 선포하고 있다. 물론 나에게도 예술은 자유이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임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