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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윤 Jun 24. 2021

해금산조가 탄생하기까지, 슈퍼스타 지영희

천지윤의 해금이야기

산조(散調)      

전통음악 안에 ‘작곡’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전심수(口傳心授)와 공동창작의 음악문화다. 세월에 의해 걸러지고 다수에 의해 전승된 가락을 개인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서양음악에서 작곡가가 중요시 여겨지는 것과 다른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산조’라는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연주 전, 장단과 조성을 러프하게 구성한다. 여기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가락을 더해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이것이 산조라는 음악의 작법이다. 연주가의 초 절정 기교를 감상하고 기량을 판가름하기 좋은 음악으로 높은 예술성을 가진 음악이다.  



음악가가 체화한 판소리와 굿, 민요 등의 가락들이 재료가 된다. 장단과 조성을 최소한의 규칙으로 삼는다. 연주자의 컨디션에 따라 가락이 샘솟는 날도 있을 테고 가락이 빈곤한 날도 있을 테다. 이에 따라 연주 분량도 유연하다. 전라도 사람이라면 남도지방의 가락을 많이 체득했을 테니 전통적인 남도가락이 주를 이룰 테고, 경기도 사람이라면 경기가락이 주를 이룰 테다. 이처럼 구성되는 가락은 타고난 지역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한다. 



여러 악기가 합주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연주하기도 하는데, 이를 시나위라 한다. 독주면 산조, 합주면 시나위인 셈이다. 장단과 조성을 최소한의 규칙 삼아 자신에게 내재된 가락을 질료로 자유롭게 구성하는 음악이다. 

즉흥연주를 하다보면 자신만의 가락이 정리되기도 하고, 자주 쓰이는 가락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연주자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겠다. 연주를 거듭하다보면 어느 정도 정형성도 띄게 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자주 가게 되는 길’이랄까. 이렇게 연주의 맥락과 가락이 정립되면 연주자의 이름을 따서 **류 산조라고 이름 붙인다. 만약 내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산조 한바탕을 짜게 된다면 ‘천지윤류 해금산조’가 되는 것이다. 연주와 작곡(?)이 함께 가는 흐름이다. 구성과 즉흥, 개성과 정형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산조’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지영희      

지영희는 대표적인 해금의 명인이다. 1910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1979년에 돌아가셨다. 일제시대와 6.25전쟁. 분단. 군사독재정권. 민주화를 겪은 세대다. 이 시기동안 문화적으로 서구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았다. 전통음악의 비중은 축소되고 서양의 음악문화가 더 익숙해진, 전통과 서구의 문화가 전복된 시기이다. 지영희는 이 시기에 여전히 전통음악을 연주했고, 전승했고, 생성했다. 지영희가 중요한 지점은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지영희는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이종결합이 중요한 이유다. 지영희의 고향인 평택에 가면 <지영희박물관>이 있다. 이곳에 가보고 놀랐다. 그의 다양하고 폭넓은 행보 때문이다. 직접 가보시길 당부하며 박물관 내부를 살짝 소개하겠다. 



지영희박물관은 평택호 앞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세계지도가 있다. 지영희는 당대 최고의 무용수였던 최승희와 함께 만주로, 유럽으로, 미국으로 공연 투어를 했다. 이 세계지도에는 지영희가 최승희와 투어를 다닌 연혁과 행로가 그려져 있다. 그에 관한 기사들도 스크랩 되어있다. 지금의 BTS처럼 최승희의 인기는 글로벌했으니 이 공연단은 K-music의 시초라 볼 수 있겠다. 


최승희 무용가



지영희는 무용 분야 뿐 아니라 영화에도 합류했다. 1950~1960년대에 신상옥 감독 영화에 참여해 대부분의 사극영화 OST를 맡았다. 그 가운데 ‘벙어리 삼룡’, ‘월하의 공동묘지’, ‘장희빈’은 지영희가 OST를 작곡한 대표적인 영화다. 박물관 자그마한 전시실 내부에서 OST LP판을 볼 수 있다. 지영희가 전국을 자전거 기행하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장단과 민요 등을 채집하러 다닌 이야기도 특별하다. 전시실에는 지영희의 악보와 함께 자전거와 해금, 안경 등의 유품 등이 있다. 




지영희는 경기무악을 세습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기무악은 경기굿에 수반되는 음악이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춤을 보고, 듣고, 배울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양금, 피리, 해금, 장구, 춤 등 전통음악 전 분야를 섭렵해 배웠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굿쟁이’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로 키워냈다. 



지영희는 성금연이라는 가야금 명인을 만난다. 성금연 역시 남도지방 유서 깊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부부로서 예술적 자산을 꽃피워냈다. 지영희류 해금산조 만큼이나 성금연류 가야금산조 또한 가야금산조 유파에 있어 주류의 유파로 손꼽힌다. 



성금연 & 지영희



성금연 명인이 국악계를 주름잡으며 활약하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여배우가 따로 없다. 캣아이 모양의 선글라스를 끼고 세련된 수트를 입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잘나가는, 성공한 예술가 부부였으리라. 1970년대 지영희와 성금연, 김소희명창과 김윤덕명인이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했고, 이 역시 기사화 되었다. 귀국해서 취입한 ‘카네기홀 공연 기념반’이 남아있기도 하다.    








지영희류 해금산조     


1960-70년대 지영희는 해금산조를 완성하기 위해 애쓴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굿거리-자진모리 5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음악을 60년대에는 5-6분 정도로 즉흥성을 가지고 연주한다. 그가 남긴 연주는 매번 연주 시간도, 가락 구성도 조금씩 다르다. 1960년대 이전에는 즉흥성이 강했을 테지만 이 시기에는 교육과 악보화 등을 목적으로 정형성이 뚜렷해진다. 



1975년에 이르러 30여분 되는 산조가락을 남긴다. 정식적인 음반 취입이 아닌 형태다. 지영희는 당시 여러 불행한 사건들을 겪으며 하와이로 이주하게 된다. 하와이에서 카세트 테입으로 녹음된 형태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매우 귀한 자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라하게 남은 자료이기에 마음 아프다. 



1975년 녹음된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지영희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경기굿에 연주된 다양한 가락과 더불어 그가 체화한 다양한 음악을 망라해 지영희라는 필터를 통해 산조 안에 구성한 것이다. 말년에 이 산조를 만들기 위해 가락을 벼리고 벼렸을 것이다. 섬세하고 유려하며 재기 넘치는 이 가락들은 해금의 오랜 흐름을 잘 정리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해금이 고려시대인 12세기 즈음 유입된 이후 수백년의 흐름 안에 변변한 독주곡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1975년, 지영희에 이르러서야 30여분의 해금독주곡이 탄생한 것이다.      



지영희는 다행이 김영재, 최태현이라는 뛰어난 제자를 키워낸다. 동년배의 두 인물이 지영희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김영재는 뛰어난 연주가인 동시에 작곡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80년대부터 김영재의 유수한 곡들이 창작된다. 김영재류 해금산조도 만든다. 최태현은 스승인 지영희의 가락을 근간에 두고 첨삭을 거듭하여 이를 악보와 논문으로 남기는 작업을 했다. 지영희류 해금산조의 원형을 기록함과 동시에 가락의 다양성도 만들어냈다.  



해금이 독주악기로 성장하는데 있어 지영희라는 존재와 두 제자의 활약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해금은 여전히 합주음악 안에서 이어주고 연결하는 매개의 악기로서만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 같다. 지영희 명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영희는 해금을 구원한 슈퍼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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