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육아를 하던 시절 나의 하루는 이랬다. 1부, 수업이나 공연을 마치고 불이 나게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온다. 2부, 집으로 출근. 아이를 옆방에서 놀게 하고 나는 입시생 레슨을 한다. 3부, 아이를 씻기고 저녁을 차려 먹이고 재운다. 하루 마감.
3부 순서의 피날레. 아이를 재워야 할 때면 방에 불을 끄고 자는 척을 했다. 아이가 겨우 잠들고 나면 침대에서 빠져나와 책을 읽곤 했다. 한때 희귀한 옛날 영화까지 찾아보던 나인데, 근사한 영화라 입소문이 난 영화들을 켜놓고 볼라치면 육아의 피로에 지쳐 잠들어버렸다. 장면의 흐름을 놓치고 나면 흥이 깨져 다시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책을 읽다 잠드는 날도 많았지만 책장을 다시 펼치는 일은 달랐다. 책과 나만 존재하는 밤의 적막 속에서 그 세계로 조용히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좋았다. 처녀 때처럼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다니는 ‘예술적 외출’은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다행히 책에는 무한하다 느껴질 정도로 새로운 세계들이 활자로 존재하고 있었다. 미술이든 영화든 현장에서 즐길 수 없다 해도 책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해 주고도 남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림책을 읽어주어야만 하는, 그러니까 내 책을 읽을 시간을 아들과 나누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다행히 그림책의 세계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책 육아’라는 이름으로 그림책 사냥을 하러 다니며 그 시간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어른들의 책이 존재하는 장소들은 고요하고 정갈했다. 그림책이 존재하는 장소들은 생동감 있는 동심과 꿈의 세계였다. 서가로 구분되는 어른과 아이의 세계를 넘나들며 책의 세계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들이 읽기 독립을 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아들이 스스로 책을 읽어야 나야말로 읽기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구몬 학습 덕분에) 아들이 어느새 띄엄띄엄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에게 ‘어서 읽기 독립을 하라고’ 재촉할 수는 없고, 아들이 가능한 한 빨리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만한 묘안이 필요했다.
아들에게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그림책 읽어주는 아이가 되어보지 않을래?’라고 제안했다. 아들은 선뜻 그 뜻을 받아들여주었다. 그 작은 채널은 아들과 나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되었다. ‘안녕? 친구들! 나는 그림책 읽어주는 아이야, 오늘 소개할 책은-’으로 인사말을 시작한다. 책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마치고 ‘친구들, 그럼 준비됐어?’라는 멘트 후 더듬더듬 책을 읽어나갔다.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핸드폰으로 영상 촬영을 진행했다.
종종 시즌 이슈에 따라 책을 선정했고, 야외 촬영도 했다. 핼러윈 시즌엔 공포 특집을 기획했다. 한밤중 동네 공원을 찾아가 ‘할러윈 밤의 오싹오싹 축제’ 그림책을 소개하며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려 애썼다. 그저 귀여울 뿐이었지만 아이는 진지했다.
앤서니 브라운 ‘미술관에 간 윌리’라는 책이라면,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간다. 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최정화 작가의 거대한 조형 작품을 소개하고, 그림책 읽는 영상을 찍는 식이었다. 이 책 속엔 앤서니 브라운이 사랑하는 캐릭터인 고릴라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에,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 밀레의 이삭줍기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위트 넘치는 방식으로 재창조 되어 변주되고 있었다. 명화 속에 숨겨진 수많은 신화적 상상력과 함께.
이 프로젝트와 함께 아들은 자라났다. 어느새 미술관과 공연장, 책방과 도서관에 손잡고 갈 나이가 되었고, 책을 자연스럽게 읽는 때가 왔다. 이 안에서 책은 우리와 늘 함께였고, ‘그림책 읽어주는 아이’ 프로젝트도 계속되었다. 예술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나도 다시 그 세계로 소환되었음은 물론이다. 읽기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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