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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Sep 15. 2021

나의 글쓰기 역사


어릴 때의 나는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도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때 큰 의미 없는 글짓기 상을 몇 번 받은 적이 있긴 한데, 그 나이의 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어깨가 으쓱 올라갈 법한데도 그랬다.


애초에 글쓰기뿐만이 아니라 매사에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가난에 주눅이 든 아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특별히 나에게 '너 글 잘 쓰는 구나' 라고 북돋워주거나, 혹은 '너 글 쓰는 거 재미있니?' 라고 물어봐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글짓기 상장을 수여할 때 난데없이 내 이름이 불리면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마냥 부끄러웠던 것만 기억날 정도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학교에서 독후감 쓰기 대회가 있었다. 나는 집에도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고, 도서관을 이용할 줄도 몰랐기 때문에 학교에 있는 책을 대충 골라 읽었다. 나중에 그 책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제법 유명한 이야기의 책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제목은 '쌍둥이 대소동'.


여름캠프에서 만난 두 아이가 자신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각각 엄마, 아빠와 살게 되면서 헤어진 쌍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달 간의 캠프가 끝나고 두 아이는 서로인 척 연기하며 서로의 집으로 돌아간다. 각자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 아빠와 살면서 그들을 설득해 가족을 재결합시키겠다는 발랄한 소녀들의 동화 같은 계획 덕분에 벌어지는 귀여운 소동 이야기이다.


내가 독후감을 뭐라고 썼는지는 물론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그 또래의 아이답게 읽고 느끼고 생각한 대로 단순하게 써 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내게 평소 별 관심도 없어 보였던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셨을 땐 깜짝 놀랐다. 그런 류의 관심을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독후감 뒷부분에 내용을 좀 더 추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혼가정에서 아빠 없이 자라고 있는 아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그런 감상에 대하여.


어렸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선생님이 날 위해 감사하게도 첨삭지도를 해주신 거란 것도 알았고, 알려주신 대로 잘 쓰면 어쩌면 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글짓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가난한 이야기 덕분이 될 거란 생각도.


나는 더 쓰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왜 안 써왔느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걱정을 하면서도 쓰지 않았다. 그냥 쓰기가 싫었던 것 같다. 그 책 속의 소녀들은 나와는 너무 달랐고, 나는 그 아이들처럼 웃을 수 있는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가족의 재결합이라니, 내가 감히 꿈을 꿀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도대체 내가 뭐라고 쓸 수 있단 말인가. 뭐라고 쓰든 그건 내 진심도 아닐 터였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이해한다. 그 애는 자존감은 낮으나 자존심은 아주 센 아이였다. 그리고 그때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듯하다. 학교가 원하는 글짓기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잘하기는커녕 좋아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히 항상 무언가를 '쓰는' 인간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더 이상 의무적인 일기 쓰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나는 진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후 문구점에서 빨간색 일기장을 사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썼다. 매일 무언가를 썼다. 내가 겪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썼다. 그때 그 일기 쓰기를 생각하면 어딘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썼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우산 없이 홀로 걷는 나그네처럼 외로운 사춘기를 맞이한 여중생에게 유일한 위안은 아마도 그 빨간색 일기장이었을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교실 앞뒤 게시판과 복도 곳곳에 붙은 서클 가입 안내문들을 보며 내가 찾아간 곳은 놀랍게도 문예부였다. 글쓰기를 잘하기는커녕 좋아한다고도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내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정지용의 '향수' 가 너무 좋아 외울 정도로 읽고, 박재삼의 '추억에서' 를 되뇌며 남몰래 눈물짓는 아이가 나였다. 그래서 홀린 듯이 찾아간 곳이 문예부였다.


문예부에서 뭔가를 좀 썼을 법도 한데, 사실 거기서 쓴 것은 별로 없다. 뭔가를 쓴 기억이 거의 없다. 그때 전국구 단위의 무슨 큰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온 3학년 언니가, '키워드가 있어. 예를 들면 강은 역사라든가 하는 거. 그런 걸 주제에 잘 맞춰서 쓰면 상을 받을 수 있어.' 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쌍둥이 대소동' 이었다.


읽는 것은 좋으나, 여전히 쓰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던 내가 일기 쓰기 마저도 관두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엄마와의 다툼 때문이었다. 무엇이 발화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불길이 우리 모녀를 덮쳤다. 불길 속에서 엄마는 '내가 너를 모를 줄 아냐? 니 일기장에서 다 봤다!' 라고 시한폭탄의 시곗바늘을 뽑는 실수를 했고, 그로 인해 내 안의 무언가는 전부 재가 되도록 다 타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때까지 썼던 총 4권의 일기장을 모두 버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다시는 일기 같은 거 쓰지 않을 거야. 평생 다시는 쓰지 않을 거라고. 엄마가 그렇게 만들었어. 엄마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절대 잊지 말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만 둔 일기쓰기는 대학생이 된 후 다시 시작됐다. 그 때 썼던 일기장들이다.


문예부에서 한 일은 학교의 교지를 편집하는 일이었다. 교지에 실을 글들을 쥐어짜내서 쓴 일이 아마도 제일 중요하고 큰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건지 그 기억은 몹시 희미하다.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끝없는 오탈자 검사 후 원고를 가지고 담당 선생님과 함께 출판사를 오갔던 일이다. 출판사 직원 분들이 시켜주신 자장면이 맛있었던 기억도 나고, 중앙동 출판사 거리로 향하는 선생님의 차 안에서 들었던 비틀즈의 노래들도 기억이 난다.


최종 원고를 출판사에 가져다주고 오면서 2년간의 문예부 활동을 마무리 짓던 날, 겨울방학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얼마 후 고3 수험생으로의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담당 선생님이 물으셨다. 'ㅇㅇ이는 계속 글을 쓸 거니?'


스쳐 지나가 듯 아주 담백한 질문이었는데도 내 마음은 어찌 된 일인지 속절없이 흔들렸다.


- 아니요, 별로...

- 왜?

-... 잘하지 못할 거 같아서요.

-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지.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지 않을까?

- 좋아하는 걸 잘하려고 노력해도 잘 안되면

  더는 좋아지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좋아하는 건 그냥 좋아하는 대로 남겨두고 싶어요.


선명하지 않은 그 기억 속 나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던 선생님과 어려운 대화를 하면서 꽤 당황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진심이면서도 진심의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다 말할 수 없었던 내 진심은 이런 것이었을 거다. '엄마가 무조건 교사가 되래요. 그래서 저는 교대 아니면 사범대를 가야 해요. 그리고 국립대를 가야 하고요. 사립대는 갈 형편이 전혀 못되거든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겠어요?'


선생님은 내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혼잣말인 듯 뒤이어 하신 말씀은 오래 잊히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다운 게 좋은데.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건 슬픈 것 같아.'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나는 어쩌면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가 아닐까... 하고.


나는 많은 시간들을 그저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 시간들에는 '어차피 나는 못해' 라는 낮은 자존감, '잘하지 못할 바엔 아예 안해' 라는 어리석은 자존심, 한 번 들어선 경로를 쉽게 이탈하지 못하는 겁쟁이의 소심함, 당장 눈앞에 주어진 것은 또 열심히 하고 보는 꽉 막힌 성실함, 그런 것들이 한데 뭉쳐져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나의 '글쓰기' 에 대해 자각하게 된 건 스물여섯 살이 넘어서였다. 내 안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끝없이 쓰게 한다는 것을 그제야 정확히 깨달은 것이다. 나는 쓰지 않고서는 시간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재가 되어 다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살아있었다. 그래서 끝없이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에 메모를 쓰고, 또 블로그에 무언가를, 그러니까 '뭐든' 쓰고 있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세상을 견디는 힘이다. 누군가에게는 음악, 누군가에게는 그림, 누군가에게는 사랑, 누군가에게는 사람... 나에게는 그것이 바로 '쓰기' 였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당장 무언가를 잘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기엔 나는 도무지 제대로 된 글쓰기를 해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그즈음 우연히 웹상에서 만난 글쓰기 선생님은 내게, '계속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꾸준히 써봐요. 뭐라도요.' 라고 말씀해주셨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 말엔, '깊이 고민하다 보면 그 고민과 삶이 흔적을 남길 때가 오겠지요. 조급해마시길요.' 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그리하여 내가 이제야 쓰게 된 나의 브런치, 나의 이 글들은 결국 내 고민과 삶의 흔적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쓰면서야 다시 깨달았다. 내가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삶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전에는 다른 어떤 글도 쓸 수 없으리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쓰기로 했다. 쓰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내가 쓰는 이유를, 나 자신을, 나 자신의 삶을.


알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나는 썼고,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무언가를.


그 무언가가 다시 무언가가 되어도 좋고 무언가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썼고, 그러므로 존재한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될 나의 글쓰기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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