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rimi Sep 17. 2021

아버지를 미워한 게 아니었다니


국민기초생활보장 제도에 의해 기초수급자로 책정이 되어 생계급여(현금)와 의료급여(의료비 감면) 지원을 받으려면 본인의 소득과 재산뿐만 아니라 '부양의무자 기준' 또한 적합해야 한다. 부양의무자에게 신청인을 부양할 능력(소득과 재산)이 있다고 판단되면 정부의 지원은 제한되거나 감소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부양의무자' 란 '일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이다. 즉 부모와 그 배우자(재혼으로 인한 양부, 양모 포함)와 자녀와 그 배우자(며느리와 사위)를 말한다.


생계 곤란으로 찾아온 민원인과 상담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 친지, 혹은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이는 없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는데, 중장년층 이상 어르신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다. '아이고, 자식들은 즈그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도와달라 할 수 있겠느냐.' 는 이야기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연락이 안 된 지 오래다.' 라는 이야기.


후자의 경우에는 또 많은 다양한 사연들이 있지만, 내 경험상 가장 많은 축에 속하는 것은, '이혼하고 집을 나와서 (혹은 먹고 살기 힘들어 집을 나와서) 자식들과는 연락이 끊어졌다.' 는 것이다. 자녀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거나 혹은 수소문해서 알고는 있어도 차마 연락할 수는 없다고들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사정들이다.


그 경우에는 담당자가 부양의무자 되는 자녀에게 직접 연락을 취한다. 귀하께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거하여 신청인 ㅇㅇㅇ님의 부양의무자에 해당하므로, ㅇㅇㅇ님의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신청에 따른 '금융정보 등 제공동의서' 를 작성하여 제출해 주시라, 만약 동의하지 않을 경우 해당 사유를 '사실확인서' 에 구체적으로 작성하여 회신해달라, 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한다. 신청인의 부양의무자인 자녀의 소득과 재산을 조회해야 하므로 정보 제공에 동의하거나, 만약 동의할 수 없다면 그 사유를 써달라는 것이다.


간혹 '금융정보 등 제공동의서' 를 작성하여 회신을 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는 '연락이 안된 지 오래다.' 라는 민원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실확인서' 가 회신되어 온다. 이 사실확인서는 '가족관계 단절 확인서' 라고도 부른다. 해당 확인서에 쓰인 것은 주로 그들의 아픈 개인사가 대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술만 마시면 엄마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가하였고 가족을 부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아버지라고 부양을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연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릴 때 저희를 버리고 집을 나가 평생 못 보고 살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런 연락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등등.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슬픈 역사들이다.


담당자는 제출받은 '사실확인서' 를 바탕으로 조사를 실시하고, 조사 결과를 '생활보장심의위원회' 에 제출한다. 위원회에서 통과되면 '가족관계 단절' 로 인정되어 '부양의무자' 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아주아주 드물게 간혹 이 '가족관계 단절' 이라는 표현 때문인지, 그래도 부모 자식 간인데 어떻게 그러느냐... 라며 신청을 취소하는 경우도 있다. 괜히 이제 와서 자식을 귀찮게 만들까 봐 그냥 안 하겠다는 부모도 있고, 그래도 부모니까 자신들이 한 번 연락을 해보겠다는 자식도 있다. 워낙 많은 민원인들의 다양한 사정들을 지켜보다 보니 이젠 무덤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한 심정을 떨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인사 덕분이다.


스물일곱 살에 사회복지공무원에 채용되어 일을 시작하면서 한동안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어딘가에 살아있을 나의 아버지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면 나에게도 '부양의무자 금융정보 등 제공동의서 제출 요청' 우편이 찾아올 것이라는.


내가 나의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거의 없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여섯 살 때 집을 나갔고, 열두 살 때 딱 한 번 스치듯 본 것이 마지막이라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희미하지만 아버지가 일하는 현장이라며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가서 뿌듯해하던 기억은 있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엄마는 그걸 못마땅해했다는 것도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 하던 일이 잘 안된 건 분명하다. 빚만 남기고 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졌다. 엄마는 여섯 살이던 나를 업고 다니며 아버지의 친구들, 지인들을 만나 사라진 남편의 흔적을 수소문했다. 그 다방에서 엄마가 단 한 잔만 주문했던 뜨거운 우유. 무슨 대화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뭔가가 잘 안됐다는 건 나도 눈치껏 알았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먼저 떠난 자리에서 남은 우유가 아까우니까 이건 다 마시고 가자며 어린 딸을 옆에 앉혀놓고 홀로 말이 없던 엄마. 그때 고작 서른한 살이던 엄마의 심정은 내가 감히 헤아리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대연동 산꼭대기 낡은 집에서 초량동 꼬부랑 골목 안쪽 더 낡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중에서야 엄마가 해준 말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올지도 몰라서 차마 이사는 하지 않고 2년을 버텼는데, 사정이 도저히 안돼서 더 작고 더 싼 집을 찾아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초량동에서는 조금만 살다가 이후 더 작고 더 싼 집으로 또 이사를 했다. 그 즈음의 어린 내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매일 아침 엄마가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 오빠와 나에게 50원씩 또는 100원씩 동전을 쥐어주고 가면 우리 남매는 구멍가게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었다. 엄마가 알려준 대로 마가린에 간장을 비벼서 밥을 먹었다. 그냥 그렇게 컸다.


그리고 겨울. 곧 초등학교 5학년이 되려 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불현듯 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양손 가득 무겁게 들고 온 낯선 외국 과자들과 최신형 게임기 같은 것들. 아니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냥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일단 학교에 가라는 엄마의 말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등교를 하면서도, 등교를 해서도 내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것은 아버지였을 거다. 하지만 얼른 학교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그 곳에 아무도 없었다. 저녁이 되어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우리 남매는 아버지가 가져온 것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의 아버지가 가져온 것이지만 우리의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에 돌아온 엄마는 우리 남매를 앉혀놓고 말했다. 아버지와 이혼하기로 했다고. 그리고 드라마처럼 물었다.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그럼 그렇지. 내 인생이.

어렸어도 체념이라는 걸 알았다.


그 후로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침에 한 번 안아 주더냐'는 엄마의 질문이 덧없었다. 나는 낯선 그에게 차마 '아빠' 라고 불어보지도 못했고, 그는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의 이름 한 번을 불러주지 않았으니까. 덩그러니 놓여있던 과자를 먹어도 된다는 엄마의 허락에 그것들을 꺼내 먹으면서도 그것은 도무지 우리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나에게는 없는 것. 결코 내 것이 아닌 것.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


그래도 핏줄이라서 그런지 가끔씩 친가에서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어린 손주들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소식도 전해 듣는 듯했다. 좋은 소식이라곤 없었다. 한 번은 엄마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 교도소에 갔다는 말도 있더라. 그때 이혼하기를 잘했지. 결국 인간 구실 못하고 살 줄 알았다.' 같은 말을 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젠가는 그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것이고, 그리하여 내게 '부양의무자 금융정보 등 제공동의서 제출 요청' 우편이 도착할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 또는 불안감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부양의무자 금융정보 등 제공동의서 제출 요청' 따위 오기만 해 봐라. 나는 '가족관계 단절 확인서' 를 쓸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그가 우리를 버린 것에 대하여.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하여. 신랄한 언어로 휘갈기며 결국 그리 된 그의 인생을 비웃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업무를 하면서도 때때로 그런 분노에 찬 순간들을 마주하며 시간은 흘렀다.


(생활이 어려워지면 누구라도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있고 또 지원을 받을 수 있으나, 내가 그토록 악의에 차 분노한 것은, 그가 '교도소에 갔을 수도 있다' 는 엄마의 말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정시설 수감 후 출소를 하게 되면 '환경적응기간' 이라는 사유로 3개월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기초수급자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많은 출소자들이 '출소증명서' 를 가지고 기초수급자 신청을 한다. 나는 차마 그가 범죄자까지는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늘 불안하고 슬프게 남아있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첫아기를 낳고, 지독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남편 또는 시댁과의 피 터지는 전쟁을 벌였고, 결국,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다.


남편과 시어머니를 향한 분노를 터뜨리는 나에게 상담사는 계속해서 어린 시절을 물었다. 원장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저희 시어머니가 어떤 줄 아세요? 그랬군요,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때요?


처음 몇 회차 동안 나는 일관되게 말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기억나는 게 없어요.' 그래도 상담사는 계속 생각해보라고 했다.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저는 원래부터 아버지가 없던 애라 저한테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데요...  


상담사의 종용에 겨우 쥐어짜 낸 것인지, 얼마 후 나는 아버지에 대한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두 가지 기억이었다.


추석 앞두고 엄마가 시장에 장을 보러 갔는데, 그 사이에 아버지가 오빠 머리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머리카락을 잘라줬어요. 지켜보던 저한테, 너도 잘라줄까? 하기에, 응, 하고 앉았죠. 제 머리에도 바가지를 엎어놓고 머리카락을 잘라줬어요. 시장에서 엄마가 돌아와서는 난리가 났죠. 여자애 머리를 이렇게 잘라놓으면 어쩌냐고. 제가 엄마한테 그랬어요, 괜찮다고, 나는 내 머리 마음에 든다고.


또 하루는, 그날은 일요일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랑 오빠랑 어디 가고 없었는데요. 제가 배가 고프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김치볶음밥을 해줬는데, 진짜 너무 맛이 없는 거예요. 할머니랑 억지로 먹었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만들어 준 거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었던 게 생각나요.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상담 회차에서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인정했다. '이제 알겠어요. 제가 아버지를 미워한 게 아니라... 사실은 너무 보고 싶었다는 것을요.'


내 말에 상담사는 기뻐했다. 그래요, 드디어 기억해냈군요. 머리를 잘라준 것도, 김치볶음밥을 해준 것도, 아버지가 딸을 귀여워하고 사랑했던 거란 걸 말이에요.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버지한테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 나는 기억해냈고 깨달았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를 기다리며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는 내가 더는 기다릴 수도, 기다려서도 안 되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배우자와 자녀들을 버린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는 분명 어리석고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우리를 가난과 고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철천지 원수라고 매일 욕을 했다. 그런 엄마 앞에서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는 그가 몹시도 그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더 이상 그리워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자, 나는 다시 미움으로 그리움을 지웠다. 미워하고 원망해야만 상실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놀랍게도 홀가분해졌다. 내게 아버지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꺼내기도 힘든 괴로운 단어였는데, 어느 순간 괜찮아지기 까지 했다. 그리워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야 그리움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혼자 달아나던 때의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었다. 이제 아버지는 내게 가족관계증명서에 기재된 친부 그 이상의 의미는 되지 못한다. 그리움도 미움도 모두 세월 따라 흘러가버린 것이다.


언젠가 내게 정말로 '부양의무자 금융정보 등 제공동의서 제출 요청' 같은 우편이 온다고 해도 이제는 아마 담담할 것도 같다. 조금 씁쓸한 심정으로 무덤덤하게 '가족관계 단절 확인서' 를 작성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살아가면서 다시 만나거나... 그와 관련된 연락을 받게 될 일이 있을지 없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데, 정말 만에 하나 혹여라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빈다.


부디,

아버지, 당신의 남은 생이 평안하기만을...





작가의 이전글 나의 글쓰기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