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럽고 유쾌한 할머니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싶은데 나는 여전히 옹졸하고 우울하며 화가 많은 아줌마다.
명절은 언제나 나를 인생의 목표에서 성큼성큼 멀어지게 한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속 울화통에 기어이 불을 붙여서 결국 터지게 만드는 연중 2회의 이벤트, 그것이 나의 명절이다. 옹졸하고 우울하며 화가 많은 아줌마인 나. 며느리로서의 내 자아상이기도 하다.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왜 불이 붙도록 내버려 뒀느냐고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찬물을 확 끼얹었어야지, 너는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아직도 묘하게 겁이 많다. 시어머니의 표정이 시멘트처럼 굳어가면 딱히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바짝 긴장을 한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팽팽하게 날이 선다.
이래서는 전혀 너그럽지도 유쾌하지도 못한 표독스러운 할머니가 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버텨내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몇 해 전 심리상담센터에 다녔을 때 상담사는 내가 시어머니를 통해 친정어머니를 보고 있다고 했다. 엄마가 너무 무서워서 저항하지 못했던 어린 내가 이제는 시어머니를 거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여전히 시어머니에게 소위 말해 '들이받'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나의 갈 길이 참 멀다. 어린 나는 언제쯤 단단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울화통이 터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2년간의 연애시절에는 그 흔한 다툼 한 번 없던 우리였는데. 결혼 8년 차의 나는 남편에게 고요히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아니 사실 어떤 면에서는 남편에게 더 화가 나서 그렇기도 하다. 흔한 말로 '효도는 셀프' 라는데. 남편은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신의 모친께, 우리(남편과 나)도 자유의지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라고 저항을 하려는가... 싶다가도 결국엔 '학습된 무기력' 에 빠져 갈등을 회피하는 방관자가 되고 만다.
쓰다 보니 또 울화통이 터진다.
...
일단은 폭발하여 재가 되지 말고 살아남는 것에 집중해야 겠다. 다음 명절까지 살아남아서 그때는 더 다정한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몇 해 만에 찾아뵌 나의 늙으신 외할머니가 증손주들과 함께 여전히 소녀처럼 연신 호호호 웃으신 이야기라든가. 어린 조카가 제 사촌누나인 내 딸아이와 놀며 한참을 즐거워 목소리를 높이던 이야기라든가. 명절이라고 친정에 온 20년 지기들을 2년 만에 만나 '입에 모터 달린 듯 쏟아냈던' 이야기 라든가.
그러고 보니 나쁘지만은 않았네.
그래,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위안하며.
다음 명절은 더 나쁘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