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미리 양가 부모님 댁에 들렀었기에 막상 어버이날 당일인 어제는 도리어 어버이날이란 걸 잊고 있었다. 오후에 남편이 이른 퇴근을 하여 같이 마트에 가려다가, 최근 친정엄마가 다니시던 마트가 이전을 해 자주 못 가게 되신 게 생각이 나서 같이 마트 가시겠느냐 연락드렸더니 친정엄마는 외할머니 댁에 가 계신다고 했다.
아. 맞다. 그랬지. 엄마한테도 엄마, 있었지...
외할머니는 엄마의 고향인 경남 울주군 언양읍에 사신다. 친정에서 직행버스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매년 봄이면 산에서 봄나물을 캐 엄마 동네까지 오는 직행버스를 타고 오셔서 엄마의 집 대문 앞마당에 봉지만 쏙 넣어두시고는 다시 돌아가는 길에서야 전화로, "마당 앞에 나물 넣어놨으니 갖다 먹어라." 하신단다. 엄마가 아무리 그러지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올봄에만 세 번이나 그러셨단다.
자식이 환갑이 되었어도 자식은 자식이고 엄마가 팔순이 넘었어도 엄마는 엄마다.
언젠가 나보다 더 먼저 엄마를 떠나보내게 될 엄마를 생각하니 슬프다.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 2018.5.9.
블로그에 썼던 일기가 생각이 나서 가져왔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던 어제, 아주 오랜만에 외할머니 댁에 다녀왔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여전히 총기가 가득한 두 눈을 반짝이며 어린 증손주들에게 호호호 웃어주시던 외할머니.
혹시나 싶어 미리 담가 두셨다던 감주, 이웃 할머니들과 함께 만드셨다는 송편, 어린 증손주들 먹으라고 잔뜩 꺼내놓으시는 과자들. 더 자주 왔어야 했는데 죄송하다는 인사가 되려 죄송한 마음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의 외할머니는 좀 무서웠다. 아무리 살가운 기억을 떠올리려 해 봐도 외손주들에게 다정한 외할머니는 결코 아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끝까지 엄마와 아버지의 결혼을 반대하셨다고 한다. 똑똑한 큰 딸이 일도 변변찮아 보이고 얼굴만 번지르르한 웬 놈팽이와 결혼을 하려 한다고 반대한 건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지만 외할아버지는 아예 얼굴도 안 보겠다고 하실 정도였단다. 어른이 된 내가 봐도 그럴 만했다 싶다.
엄마는 세무서에서 일하던 '김양'이었는데, 결혼하고 첫째 아이였던 오빠를 낳으면서 일을 그만두셨다. (생애 두 번째로 후회하는 일이라고 하신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의 결혼.) 그 길로 엄마의 인생에는 해 질 녘 물때처럼 가난이 밀려들어왔다.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던 아버지의 일은 하는 족족 망했다. 제대로 된 생활비를 벌어다준 적이 한 번도 없어 아기 분유값 조차 부족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그 사위가 얼마나 미웠을까. 외손주들도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딸이 우겨서 한 결혼이라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가출하고 나서는 외할머니가 가끔씩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 다홍색 두툼한 돕바(그 시절에는 그리 불렀다)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추웠던 겨울,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비어있던 쌀독에 쌀을 사 부어주시고,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주시고, 헐벗은 손주들에게 돕바를 입혀주셨던 그 겨울들...
학교에 다니다가 방학이 되면 나와 오빠는 곧잘 시골의 외할머니 댁에 맡겨지곤 했다. 늘 상냥하고 사람 좋은 외숙모도 좋았고, 사촌동생들과 들판이며 냇가에서 뛰어노는 것도 좋았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어딘가 좀 무서웠다. 나는 이미 그때도 주눅이 들어있었던가 보다.
그러던 어느 하루는 외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서 또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며 말씀하시는 거였다. '방학 때는 늦잠 좀 자도 될 낀데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엄마하고 꼭 밥을 같이 먹는다고 하대. 하루는 니 엄마가 니보고 늦잠 자도 된다 캤드만, 엄마가 혼자 밥 먹으면 심심할까 봐 그런다 했다고. 니 엄마가 니를 안낳았으면 우짤뻔 했노 카더라. 그래, 니가 없었으면 우짤뻔 했노. 고맙데이. 니 엄마가 너그들 보고 산다.'
내가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한 줄도 몰랐지만 그때서야 어린 나는 어렴풋이 외할머니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구나, 외할머니는 엄마가 너무 걱정되고 속상하셔서 그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몇 해 전 외할아버지는 편안히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혼자가 되셨다. 그리고 여전히 엄마의 고향인 경남 울주군 언양읍에서 홀로 살고 계신다. 지금은 모두 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에서 외할머니의 집 역시 이제는 마당도 장독대도 없는 아파트다. 최근엔 다리가 많이 아프셔서 혼자 집 밖을 나서는 일도 쉽지 않아 지셨는데, 그나마 노인돌보미가 매일매일 들러서 생활을 돌봐주신다고 한다.
내가 결혼하고 2년쯤 됐을 때던가, 시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괴로워하던 어느 날에, 그땐 정정하시던 외할머니가 친정엄마의 김장을 도와주러 오신 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내 시어머니를 결혼식 때 딱 한 번 보신 게 전부였는데도 김장하러 오신 그날 내게 말씀하셨다. "니 시어매도 가당찮겠더라."
옴마야, 할머니 어떻게 아셨대요, 하니, "천지를 모르고 날뛰겠디만은. 천하에 내 맘대로 안 되는 거 못 참는 양반이제. 딱 보이 글테." 하셨다. 웃음이 터진 나는 쌓인 이야기도 터뜨리려 했는데, 외할머니는 내 말을 끊고 하시던 말씀을 마무리 지으셨다. "마 됐다. 이러쿵 저러쿵 할 것 없다. 그냥 우리 시어매는 원래 그렇다, 하고 니가 알고 있으면 된다."
명쾌한 분석에 단호한 마무리였다. 그때보다 또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외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다' 라고 알고 있으면 될 것을, 나는 아직도 상처 받으며 고통을 받고 있으니, 외할머니, 저는 한참 멀었지 뭐예요.
그래서 내가 꿈꾸는 할머니는 지금의 내 외할머니 같은 할머니다.
살아온 날은 돌아볼 것도, 후회할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는 듯이 눈앞에 놓인 순간들만 바라보며 호호호 웃을 수 있는 할머니. 노쇠한 육체에도 총명한 정신으로 지나간 인생도, 남은 인생도 모두 긍정할 수 있는 할머니.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외할머니라는 말을 생각하면 함께 떠오르는 건 소가 다니던 그 흙길, 퐁당퐁당 건너던 개울의 징검다리, 외할머니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바둑이, 방안에 가득 차던 쿰쿰한 메주 냄새, 무심한 듯 잡아주던 투박한 손 같은 것. 그리고 또 호호호 웃음소리.
오래도록 잊지 못할 내 영혼의 따뜻한 일부가 되어준 기억들.
그 온기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할머니.
그래, 그런 할머니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