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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압축된 삶

무료(無聊)도로

탈출

by 위엔디

출근할 때는 고속도로를, 퇴근할 때는 국도를 이용합니다. 거리상으로는 국도가 좀 가깝지만, 운전하면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국도에는 너무 많습니다. 신호등, 주행속도, 횡단보도, 심지어 어린이보호구역을 지나치려면 인내심을 갖고 30km/h의 속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운전에 소비해야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 아침은 길이 막히지 않는 시간대로, 가장 단순하게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선호하게 됩니다.


라디오 주파수는 몇 가지로 맞추어져 있습니다. CBS FM, KBS, TBS, MBC, FEBC.... 감미로운 음악을 듣기도 하고, 뉴스나 설교를 청취하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캐럴을 듣는 것도 한 즐거움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풍경보다 라디오가 오히려 더 큰 벗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응급차량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잠시 라디오 소리를 낮추고, 한쪽 편으로 차량을 이동시켜 긴급차량의 동선을 확보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몇 개의 터널을 통과합니다. 또 다시 몇 개의 톨게이트를 지나칩니다. 그렇게 하루는 시작이 됩니다.


퇴근할 때는 오히려 국도를 이용합니다. 고속도로로 집에 돌아가면 조금 덜 신경 쓸 수는 있겠지만, 그건 마치 하루가 아무런 의미 없이 단순한 직선 위로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를 통해 퇴근하는 길은 너무 무료한 일입니다. 차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마치 유영석 작사 작곡의 '네모의 꿈'처럼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을 지나.... 주윌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 뿐입니다. 반면 국도는 다릅니다. 누군가의 숨결, 하루의 피로, 저마다의 사정들이 엷게 묻어나는 길입니다.


손을 단단히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부부, 옷깃을 여미며 총총 뛰어가는 여학생, 길가 만두집 커다란 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과 카페 앞 창가에 분위기 잡고 앉아있는 젊은 청년이 보입니다. 리어카 속에 힘겹게 쌓아 올린 폐지 한 묶음에 이름 모를 노인의 무거운 하루가 보이고, 빨간 신호 등에 같이 대기하고 있는 피자배달 라이더의 재촉이 묘한 긴장을 조성합니다. 국도를 달리는 동안에는, 대본 없는 누군가의 일상이 내 앞에 펼쳐집니다. 아침에는 단조로움이 오히려 편안함을 주지만, 저녁에는 그 단조로움이 무료함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라고 말한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살아가는 것이 자주 버겁고 무력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한계'속에서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리며 상황에 따라 '나만의 탈출'을 시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때, 실용음악과에서 드럼을 전공하는 아들의 졸업공연이 있습니다. 드럼은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특별한 박자와 힘, 그리고 리듬이 묘한 감흥을 일으킵니다. 현실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가끔 아들의 공연을 보러 갑니다. 내 일상의 패턴과는 다른 또 다른 환경으로 들어가 작은 '탈출'을 느끼게 됩니다. 일직선으로 달리던 고속도로를 비켜나가 구불구불한 국도로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삶은 고속도로처럼 단조롭고, 때로는 괴로운 일들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작은 국도를 찾아내고, 라디오 속 음악과 누군가의 일상, 아들의 드럼 소리처럼 예상치 못한 감흥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아들의 드럼 소리 속에서 작은 탈출을 누려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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