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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기 Dec 11. 2022

우리 곁의 학교폭력

학교폭력 심의센터 이야기

  학부모 교육 주제로‘학교폭력’을 다루면 어떨까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개 생각보다 학부모의 호응이 크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상관없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알아두면 좋겠지만, 딱히 모른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살펴보기에 불편한 주제이기도 하죠. 반면에 크게 관심을 갖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쩌면‘관심’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학교폭력 관련 내용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사례마다 집요하게 파고들기도 합니다. 눈치챘겠지만, 자녀가 현재 학교폭력에 관련되어있거나 예전에 관련 경험을 했던 분들의 경우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학교폭력이 내 앞의 당면 과제이거나 자신이 학교폭력의 당사자라면 학교폭력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기 힘들겠지요. 


  자동차 사이드미러에는,‘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학교폭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지만, 의외로 우리 가까이 있는 게 학교폭력입니다. 학생이나 학부모라면 학교폭력의 당사자가 될 가능성에 늘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소 문제행동이나 장난이 심한 학생이라면 부지불식간에 학교폭력 관련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부러 불쾌감이나 괜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편할 수 있지만 엄연한 사실이자 마주한 현실임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학교폭력이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온 까닭은 무엇일까요? 학교폭력이 예전보다 더 많아졌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인성이 자꾸만 안 좋아져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유형의 학교폭력이 생겨나기 때문일까요? 이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학교폭력은 점차 늘어나고 영악해지며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일종의 착시효과일 수도 있습니다. 


  주위에서 이러한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나도 학교 다니고, 학창 시절 겪었지만, 우리 때도 다 그랬어. 애들끼리 장난치고 싸우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는 거지. 그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전부 학교폭력이야. 마음 좀 가라앉히고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면 될 일인데. 별것도 아닌 것까지 모두 학교폭력이랍시고 유난스럽게 난리들인지 모르겠어.”그렇습니다. 과거에도 학교 안에서 다툼은 있었고 친구를 괴롭히거나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경우들도 허다했습니다. 원래 있었던 일들이 학교폭력이라는 용어 아래 묶이고 표면화되어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학생 개인이나 학교의 지도에 온전히 맡겼던 일입니다. 때로는 어른들이 나서서 대신 사과하거나 서로 합의했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어느 순간‘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새삼스럽게 나타난 것이죠.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싶은 것은 관련 법의 제정 및 시행입니다. 2004년 1월 29일,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하 학교폭력예방법)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7월 30일부터 동 법률이 시행되었습니다. 어떠한 분야의 법이 만들어진다는 건 그 사회의 체계가 견고해지고 안전망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과제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거친 공정하고 합리적인 과정이 생긴다는 것이고, 문제에 대해 사회적 요구와 필요를 수용한 해결 방안을 마련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학교폭력예방법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전 일부의 인식처럼 학교폭력에 대해 학생 각자의 힘으로 헤치고 견디라는 식은 일종의 방임일 수 있고, 그저 애들 장난으로 손쉽게 치부하는 건 학생 피해에 대한 무시이자 회피일 수 있습니다. 섣불리 버릇 고친답시고 학생의 문제행동에 대해 강압적으로 혼내고 체벌하는 건 폭력의 재생산이자 악순환으로 이어질 공산(公算)이 더 클 겁니다.‘애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라는 식으로 학교폭력을 무책임하고 안이하게 대하는 사회에서는 아이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해주기 힘들겠지요. 실제로 동급생의 괴롭힘에 힘들어하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학교폭력예방법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학교폭력예방법 제정의 의도와 목적은 분명 사회 인식의 진일보(進一步)라 할 만하고, 우리 사회의 마땅한 역할을 규정한 것이라는데 이견을 제기하기 힘들 것입니다.




  아이러니(irony)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법에 따른 학교폭력은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라도 학교폭력의 여부와 경중을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뭐, 이 정도 일로 예민하게 굴어?”라든지 “너도 분명 잘못이 있잖아. 네 입장만 생각하니?”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말속에 담긴 의미마저 외면하거나 폄하해서는 곤란합니다. 함부로 판단하여 말할 수 없다고 해서 본질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개인 입장에서는 기꺼이 듣고 성찰해야 할 말들입니다. 더군다나 한창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시기의 학생이라면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을 해야 할 상황이 비일비재합니다. 학교에서 이러한 말을 학생에게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할 사람은 교사입니다. 사회는 교사에게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채근하지만, 자신의 자녀가 겪는 건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러한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에 학교폭력예방법이 상당하고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보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 사람 간의 갈등을 피하거나 없앨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갈등 자체보다 이에 대응하고 해결하는 역량과 태도입니다. 학교는 그 자체로 사회이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학생들의 갈등 해결 역량을 기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갈등은 쉽게 해소되기 힘들고 금방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긴 호흡으로 기다리고 견뎌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도 일정 부분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개의 학부모는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으며 자녀의 고통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학교의 생활교육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학교 교육이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안을 학생의 성찰이나 학교의 교육에 맡길 수도 없을 겁니다. 중대 사안은 학교를 포함한 관련 사회 주체의 개입과 처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학교폭력예방법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학교폭력예방법은 심각하고 중대한 학교폭력 사안을 걸러내기 위해 학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 상황을 모조리 학교폭력의 범주 안으로 넣어버림으로써 학생 스스로 상황을 해결할 기회마저 사실상 흡수하였습니다. 자녀의 학교생활 문제에 대한 학부모의 조바심과 자녀보다 더 민감한 반응은 학교폭력예방법을 학교 안으로 서둘러 끌어당겼습니다. 법은 학교폭력의 인지 및 감지부터 사안 처리의 모든 과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으로 인해 작은 일이 더 커져버리기도 하고,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었던 친구 관계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기도 합니다. 




  학교 입장도 곤란하고 난처하며 때때로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는 행정기관이기 이전에 교육기관이고, 사안 처리를 위한 수사기관이나 학생 처벌을 위한 사법기관이 아닙니다. 학생 간 갈등이나 다툼이 있다면,‘처리’가 아니라 상담이나 훈육을 통해 ‘교육’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법에 따른 ‘과정’이 생기면서 사안에 섣불리 관여하기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핑계나 변명 같은 얘기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학교는 본래의‘교육’의 역할을 담당하려다 은폐의 오해를 받을 수 있고, 해결의 의지를 가지려다 사안 축소나 한쪽 입장 봐주기의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학교가 그런 것 두려워서 제 할 일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지당한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학교는 사안 처리 과정에서 별다른 권한이 없으며, 마땅한 보호 장치도 없습니다. 학교의 역할을 말하면서 정당하게 존중받아야 할 역할의 침해에 대해서는 그저 감당하고 희생하라고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학교는 학교폭력을 법적 절차와 행정적 방식대로 엄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심지어 학생들끼리 이미 화해한 다툼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처리해야 하며, 그 누구도 피해 사실이 없다고 해도 학교폭력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이는 학교의 의도나 의향이 아닙니다. 법이 적용되면 관련 주체의 판단 능력이나 기회도 함께 법 안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법은 융통성이나 유연성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학교 교육은 공정하고 엄격해야 하는 한편, 개인의 특성과 상황의 여건에 따라 유연하고 주관적으로 접근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육 영역에 법적 논리를 적용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하고, 필연적으로 감수해야 할 부분을 최대한 따져봐야 합니다. 


  학부모들도 학교폭력예방법에 불만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괜한 법적 과정을 겪게 한다면서 심의위원회 회의실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보호자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법은 학부모들로부터 점차 외면받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법은 최근의 학교 분위기와 꽤 어울리거든요. 지금의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교생활 문제에 대해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으며, 학교의 조치나 교사의 지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생활 적응이나 문제 상황에 대한 대처와 같은 능력은 금방 길러지는 게 아니며, 변화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거나 문제 해결이 명쾌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의 방식이나 과정은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힘들고 불편할 수 있으며, 당장 이해되지 않거나 수용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부모들은 선뜻 받아들이거나 기꺼이 믿어주지 않습니다. 일단 내 자녀 입장의 문제부터 신속하게 해결되어야 하며, 학교 및 교사의 교육 철학이나 방법도 내 자녀의 만족도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즉, 학교는 학생의 문제 상황에 관여하기 녹록지 않으며, 순조롭게 개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관련‘법’이 만들어져 학교에 제공된 것입니다. 학부모는 자녀의 학교생활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민다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막상 자녀의 일로 다가오면 누구보다 먼저 법대로 하자며 나섭니다. 내 자녀의 문제라면 무엇보다 서둘러 해결해야 하고, 학교 교육에만 맡겨두기엔 상대 아이와 보호자에 대한 울분을 쉽게 삭일 수 없는 것이죠. 이때, 성에 차지 않더라도 결국 빠르고 명쾌한 해결책으로‘법’만 한 게 없는 것입니다. 학부모는 학교폭력예방법에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 같지만, 사실 가장 적극적으로 반기고 활발하게 활용하는 주체입니다. 어쩌면 이 법은 학부모의 바람과 기대로 만들어졌고, 학부모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생명을 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의 현실은 일종의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결코 누구를 탓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그저 현실의 답답한 흐름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아무튼 법적으로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 상황을 학교폭력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학교 바깥에서 일어난 일도 학생 대상의 사건이라면 학교폭력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학교폭력이 되는 순간, 법적・행정적 절차대로 처리해야 하는 사안이 됩니다. 학교폭력 사안은 당사자인 학생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확인도 함께 이루어집니다. 보호자가 자녀의 학교폭력을 인지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말 그대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변합니다. 정작 학교폭력 관련 학생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지내는데, 학생의 보호자들만 사안을 붙잡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심지어 피해관련 학생은 사안 처리과정이나 조치 결정으로 친구들을 힘들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친구들과 계속 잘 지내고 싶어 하는데, 보호자가 수용할 수 없어서 끝까지 매듭을 지으려 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럴 때는 누구를 위한 학교폭력 처리이고, 무엇을 위한 사안 해결인지 의문스럽고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학교폭력예방법은 이를 보완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부추기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지금의 학교폭력예방법에서는 학교 자체적으로 사안을 종결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몇 가지 법적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정확하게는 4가지의 조건인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뤄보겠습니다. 어쨌든 법적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않는다면 사안은 심의위원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심의위원회 단계는 사안을 학교 단위에서 처리하는 게 아니라 각 지역의 교육지원청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안을 정식 학교폭력으로 다룬다는 뜻이고, 관련 학생에게 조치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폭력이 어른 싸움으로 된다면 얼마든지 조건은 미충족 될 수 있습니다. 설령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끝나는 게 아닙니다. 피해관련 학생의 보호자가 심의위원회 개최를 요구하면, 학교는 무조건 사안을 교육지원청 심의위원회로 보내야 합니다. 선택이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법에 명시된 이행 사항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물론 비밀 유지를 위해 실제 경험한 사례를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패턴(pattern)이므로 이해를 돕기엔 충분할 것입니다. A와 B는 교실에서 서로 놀리는 장난을 하며 놀았습니다. B는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A와의 일을 말합니다. A가 B에게 한 말을 들은 B의 엄마는 놀라움과 분노를 느낍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B는 엄마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분위기상 적극적으로 부인(否認)이나 해명하지 못합니다. B의 엄마는 남편에게 B의 학교 생활에 대해 의논합니다. B의 아빠는 A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화를 냅니다. 다음날, B의 엄마는 A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합니다. A는 서로 장난친 것이라며 억울해하고, 먼저 놀린 건 오히려 B라고 말합니다. 목격자도 여러 명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안 B의 아빠는 학교에 전화해서 A의 적반하장(賊反荷杖)식 행동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목격자라는 아이들도 한통속이라며 모두 학교폭력으로 신고합니다. 이때, A가 자신도 B로부터 놀림을 받았다며 B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하여 쌍방 사안으로 만들지 않는 한, B는 피해관련 학생이고, A는 가해관련 학생으로 사안 접수가 됩니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융통성 없이 진행됩니다. 학교가 섣불리 나서면 사안을 축소하거나 은폐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학부모의 목소리가 크면 최대한 수용해줄 수밖에 없는 게 학교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학생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피해라고 여긴다면, 반박할 수 없는 피해가 되는 것이고, 피해를 호소하며 학교폭력으로 신고하면 그 자체로 학교폭력 사안이 됩니다. 학교는 조사를 통해 경미한 사안이라 판단할 수 있고, 사과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여 자체 종결할 수 있습니다. 이때, B의 보호자가 자체 종결에 동의해야 합니다. B의 아빠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무조건 사안을 심의위원회로 보내도록 요구하면, 사안은 심의위원회로 보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A의 보호자뿐만 아니라 목격자로 진술한 학생들의 보호자들도 심의위원회에 참석하라는 통지서를 받게 되는 것이죠. 물론 심의위원회에서 학교폭력의 성립 여부부터 다시 살펴보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날벼락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셈입니다. 심의위원회 개최가 요청된 상황에서는 학생은 물론 보호자 간 접촉을 가급적 제한합니다. 당사자간 갈등이 더 커질 수 있고, 무엇보다 사안이 오염 또는 왜곡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안의 여부 및 정도는 심의위원회에서 공정하게 살필 수 있도록 학교 및 관련자는 협조해야 하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보호자 간에 화해를 할 기회도 차단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학교폭력을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정답이고 옳은 방향일까요? 학교폭력예방법이 생기기 전에도 학생의 문제행동을 선도하기 위한 법과 행정 절차는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폭력예방법의 취지와 역할도 분명하며, 공감할만합니다. 결국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학생을 보호하며, 문제 상황을 최대한 개선해나가려는 방안일 것입니다. 이로 인해 불거지는 또 다른 문제 상황을 의도하거나 감수하고자 한 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상황은 엄연한 현실이고 해법을 마련하기 전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학교폭력은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일로만 치부하기엔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폭력에 관심을 갖고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든 학교폭력 예방 및 사안 처리 방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가기 위해서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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