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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기 Jan 20. 2023

법대로 합시다! _ 3

학교폭력 심의센터 이야기

  심의위원회가 생기면서 자치위원회 때보다 학교폭력 업무의 실질적 체계와 단계가 갖춰졌습니다. 학교폭력 담당교사(이하 담당교사)의 업무 처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처리’라는 표현보다는 ‘분위기’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겠네요. 표면상 업무 내용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실제 작용하는 현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니까요. 물론 업무를 ‘어떻게’ 하는가는 담당교사의 성향이나 의지에 따라 차이와 경중이 있겠지만, 공통적인 상황의 변화는 분명 존재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보다 건조해지고 간명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교육’은 줄어들고 ‘행정’이 더 크게 자리 잡았죠. 처음에 자치위원회 업무가 교육지원청으로 옮겨진다고 했을 때, 학교에서는 ‘뭐, 그래봐야 원래 하던 일이 크게 줄어들 것도 없을 텐데. 교육지원청에 관련 자료 보내줘야 할 테니 우리끼리 할 때보다 더 신경 쓰이고, 오히려 담당교사 일은 더 많아질지도 모르지.’라는 회의적인 반응도 있었습니다. 막상 심의위원회가 생기니까 어땠을까요? 확실히 이전보다 학교 업무는 경감되었습니다. 학교 입장에서 심의위원회에 보낼 사안은 말 그대로 심의위원회에 보내면 되거든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엄밀히 말해 학교폭력 업무의 대상은 ‘심의위원회를 개최해야 할 사안’입니다. 학교폭력이라는 용어가 없을 때부터 학교 안의 갈등과 다툼은 존재했었습니다. 이 모든 갈등과 다툼이 지금처럼 처리되었을까요? 대부분 ‘종결’되거나 ‘해결’되었습니다. 오해에서 비롯되었거나 잘못 알았던 것들이어서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죠. 이를 학교폭력 업무에서는 ‘종결’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당사자끼리 화해하거나 선생님의 지도와 상담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대부분이겠죠. 이를 자체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굳이 화해하지 않더라도 서로 잊어버리거나 묻어버릴 수도 있고, 그냥 안 보고 지낼 수도 있겠죠. 당사자가 이를 문제로 드러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학교폭력이 종결 또는 해결되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지금은 각자의 학교생활 문제를 공식적이고 행정적인 절차 속에 담아두었을 뿐입니다. 학교에는 업무로 이어지겠지만, 크게 까다롭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죠. 오히려 약간의 수고를 들여 학교에 도움 되는 면이 더 많습니다. 학생의 학교생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정리’할 수 있고, 이후에도 처리의 ‘근거’로 삼을 수 있으니까요. 예전의 주먹구구식 학생 생활 지도보다 수월해진 측면이 있죠. 


  문제는 종결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나 다툼이겠죠. 당사자 간에 화해하지 않거나 보호자 간 어른 싸움이 된 경우입니다. 또 학교에서 다루기 곤란하거나 민감한 사안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학교 학생들과 얽혀있거나 성희롱이나 성폭력 등 성 관련 사안들이죠. 이러한 사안들은 일상적인 생활지도 내용보다 심하거나 이를 벗어나는 것들입니다. 이때, 학교의 선택은 자체 해결하거나 심의위원회로 보내는 것입니다. 심의위원회를 개최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학교의 중재 노력에 따라 자체 해결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를 ‘심의위원회를 개최해야 할 사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상 학교폭력 업무 대상이 되는 것들이죠. 자치위원회 때는 자체 해결을 못했더라도 어차피 학교에서 심의까지 끌고 가야 했습니다. 학교 입장에서는 사안을 무엇으로 마무리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사안 처리 과정은 계속 이어졌던 것이죠. 자체 해결을 한다고 해도 그 충족 요건이 명확하지 않았고, 담임 종결로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담임교사가 사안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겠죠. 담당교사는 그 과정에서 어쨌든 업무 담당자로써 신경을 썼을 것이고, 동료 교사의 곤란을 돕기 위해 여러 역할을 했을 겁니다. 


  지금은 학교에서의 사안 마무리 방식을 ‘학교장 자체해결’과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개최 요청’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학교 내 사안 해결은 ‘담임 종결제’에서 ‘학교장 자체해결’로 바뀌었습니다. 담임교사는 사안 처리 과정에서 빠진 셈이죠.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하면 바로 담당교사의 업무로 연결되는 체계인 것이죠. 담임교사가 관여하지 않으면서 자체 해결을 위한 객관적 요건도 마련되었습니다. 모두 4가지의 요건입니다. 2주 이상의 진단서를 발급받지 않은 경우, 재산상 피해가 없거나 즉각 복구된 경우, 학교폭력이 지속적이지 않은 경우, 학교폭력에 대한 신고‧진술‧자료제공 등에 대한 보복행위가 아닌 경우입니다. 이 요건들을 충족하면 ‘학교장 자체해결’로 처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비해 사안에 대한 판단이 상당히 편리해졌고, 자체해결의 명분이 뚜렷해졌습니다. 담당교사는 각 사안에 대해 자체해결 요건에 충족하는지만 따져보면 되겠죠? 과연 그럴까요? 사안 당사자에게 ‘자체해결 요건에 충족하니 학교장 자체해결로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체해결 요건의 마련으로 사안 처리가 명확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학교폭력 업무를 기계적으로 접근하긴 힘듭니다. 그래서 자체해결을 위한 하나의 요건이 더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교폭력 사안이 자체해결 요건에 충족하더라도 피해 관련 학생 및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죠. 피해 쪽 학부모가 자체해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사안은 심의위원회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안을 처리한다면 담당교사 입장에서 어떠할까요? 어차피 자체 해결될만한 사안이라면 일부러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자체해결됩니다. 사안이 경미하거나 학생이나 보호자가 어려움에 의연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경우니까요. 심의위원회에 가야 할 사안이라면 학교 개입의 정도와 상관없이 결국 심의위원회로 갑니다. 사안이 심각하거나 관련자가 사안에 대해 상위 인지할 능력이나 여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거든요. 이러한 사안은 학교에서 괜히 중재했다간 축소나 편파 등의 오해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어떤 사안일까요? 자체해결될 수 있지만, 까딱하다간 심의위원회로 갈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학교는 이러한 사안에 주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노력의 정도는 자치위원회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피해 관련 학생이나 보호자의 반응이 긍정적이지 않다면, 사안을 마냥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흔히 가해 관련자가 ‘쟤도 나한테 그랬다. 나도 피해 입은 것 있다.’라고 나오기도 합니다. 사안이 쌍방으로 번지면 해결의 가망을 갖기 힘듭니다. 어차피 학교는 사건 인지 후 14일 이내에 자체해결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7일 이내 연기할 수 있는데, 이를 감안하면 최대 3주 이내에 처리해야 하는 것이죠. 이럴 때 담당교사는 사안을 심의위원회로 보내면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피․가해 당사자 간 연락을 지양합니다. 학교에서는 사과를 위한 면담이나 통화 등도 서로 못하도록 합니다. 심의 이전에 사안이 왜곡되거나 오염될 수 있기 때문이죠. 기왕 심의위원회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로 정했다면 굳이 학교가 주선을 위해 나설 이유가 없겠죠. 


  학교에서 심의위원회 개최 요청을 하면 교육지원청에서 다음 단계의 업무 처리를 합니다. 당사자에게 심의위원회 출석 통지를 하고, 심의위원회를 개최하며, 조치 결과 및 불복 절차 등도 교육지원청에서 알려줍니다. 사안 관련 학생이나 보호자가 문의하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심의위원회 이후 절차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것도 없는 것이죠. 학교에서는 ‘교육지원청에서 관련 안내가 있을 것이다.’ 정도로 말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사실 학교 담당교사도 심의위원회 단계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잘 모르기도 합니다. 직접 심의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 한 세부 사항을 알기는 힘들죠. 더군다나 학교폭력 담당교사는 학교 내 기피업무라서 장기간 경력을 쌓는 경우가 드물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교가 조금 더 사안에 신경 쓰고 관련자에게 살뜰하게 알려줄 수 없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담당교사가 좀 더 하나하나 살펴줄 수 없겠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타당한 요구이자 지적입니다. 그런데 담당교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거나 지적에 수긍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담당교사가 해당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아닙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담당교사는 학교폭력 업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은 주어진 업무만 차질 없이 할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담당자가 해야 할 업무에서 그 이상의 노력을 굳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업무의 체계와 범위가 명확해질수록 강화될 것입니다. 자치위원회 때보다 심의위원회 체제에서 보다 뚜렷해질 현상입니다. 


  이를 탓하거나 비난할 수 있을까요? 담당교사는 말 그대로 학교 교사입니다. 그들에겐 수업을 통한 학생 지도라는 본연의 업무가 있습니다. 수업 이외의 행정 업무가 주어지는 건 모든 교사의 딜레마이긴 합니다. 그렇더라도 학교폭력 담당교사의 현실은 좀 더 살펴볼만합니다. 업무의 시점이 정해지지 않고, 업무의 내용을 계획하거나 대비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르며, 발생한 일은 얼마큼 해야 하고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사전에 정할 수도 없죠. 담당교사들은 학교폭력 업무로 인해 학생 지도라는 본연의 역할에 지장을 받습니다. 담당교사 입장에서 업무의 범위가 보다 명확해진다면 어떠한 선택을 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담당교사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사안처리 과정의 질質은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사안을 세심하게 대하고 정성을 다하는 담당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감사해야 할 일일뿐 당연시할 일은 아닙니다. 공적 체계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작동하는 되는건 곤란하겠죠. 그래서 학교폭력 업무에 있어 다소 달라진 학교의 입장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학교의 업무를 분리하여 교육지원청에 이관한 것은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교육지원청의 역할은 학교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학교 그리고 담당교사의 역할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학교폭력 업무의 현실태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심의위원회 체제에서 학교는 학교폭력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죠.

 



  학교폭력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 자체가 증가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학교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이 폭넓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겠죠. 학교는 쏟아지는 학교폭력 사안을 처리하느라 신음하고 있습니다. 일이 많다고 해서 방치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학교가 들여다보고 껴안아야 할 일이니까요. 문제는 그래야 할 일이 학교폭력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겠죠. 학교의 역할은 사회의 포털사이트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성, 안전, 보육 등 온갖 사회문제의 해결사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학교가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학교폭력 업무도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모호성을 제거하고 체계성을 갖추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육지원청의 심의위원회 설치는 이러한 추세의 일환이라 할 것입니다. 담당교사는 사안을 보다 건조하고 행정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섣불리 비난하거나 함부로 지적할 수는 없겠죠. 그저 업무적으로만 따져본다면 바람직한 면이 더 크니까요. 


  현 상황에서 살펴봐야 할 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사안 관련자들의 인식입니다. 사안 관련 학생과 보호자는 학교폭력에 대해 어떻게 인식할까요? 또한 그들은 심의위원회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사안 관련 학생이나 보호자는 학교폭력을 ‘처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처리의 방식은 상대방을 처벌하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입장만 요구하고, 자신의 피해만 한정합니다. 사안을 통해 스스로 성찰하거나 상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아마 이토록 억울한 마당에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말할 것 같네요. 물론 이러한 인식은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의위원회 체제의 사안처리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인식이 보다 강화되는 것 같습니다. 심의위원회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의위원회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정 절차로 받아들입니다. 이때의 정의는 자신의 입장을 확인받고, 자신의 주장을 인정받는 것이죠. 자신의 입장은 옳고 상대의 주장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자신에게 잘못했고, 상대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정의인 것이죠.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학생의 아버지가 결연하게 말하던 게 기억나네요. “원래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상대 부모가 계속 거짓말을 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에게 정의를 보여주기 위해 심의위원회에 온 것입니다.” 과연 이를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도 ‘정의’가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정의가 다소 자의적이거나 편협하게 사용되었다는 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월든’의 저자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우리는 먼저 사람이 되고, 그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려 1849년 저서인 ‘시민불복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도 함께 있습니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구상으로 보면, ‘국민’은 ‘법’을 따르고, ‘사람’은 ‘정의’에 의해 사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학교폭력이 법의 제정으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법의 취지는 법의 기계적 적용이라 볼 수 없습니다. 학교폭력예방법은 학교폭력을 수면 위로 올려 학교, 더 나아가 사회가 공식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안으로 만들었습니다. 사회가 학교폭력을 들여다볼 때 단순히 피․가해자를 분류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분명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학교폭력예방법은 누군가를 처벌하고 징계하며 처단하고 응징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안 관련자가 이러한 인식을 갖는 한, ‘법대로 합시다!’는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대로 합시다!’는 학교폭력과 심의위원회에 계속 불만을 가지게 할 겁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학교폭력과 심의위원회를 바라보면 어떠한 조치나 개선을 하더라도 불신不信과 불평不平을 거두기 힘들 겁니다.




  앞에서 얘기했듯 대부분의 사안이 결국 어른 싸움입니다. 특히, 초등의 사안은 더욱 그러합니다. 상대 부모에 대한 괘씸함이 크게 작용합니다. 내 자녀 앞에서 부모의 힘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겁니다.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집요하게 사안을 파고드는 분들의 심정에는 자녀에 대한 평소의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녀가 가해 쪽이든 피해 쪽이든 보호자의 자녀에 대한 미안함은 학교폭력 사안을 계기로 북받칩니다. 자녀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있음을 증명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이를 위해 상대 아이는 죄인이자 사기꾼이자 문제아여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보는 것일 수도 있고, 최대한 그렇게 보려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일부러 그렇게 만들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보호자들로부터 “저도 아이 키우는 사람인데…….” 와 같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자신도 아이 키우는 부모이기에 상대 부모의 자녀를 이해하고 측은지심을 가지며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겠죠. 심의위원회에서 상대 자녀의 허물을 쏟아내던 보호자가 문득 ‘저도 아이 키우는 사람’이라는 말을 할 때면 아이러니와 안타까움을 함께 느끼곤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든 가식이든 어느 면으로나 이중적으로 보입니다. 상대 학생을 이해하면서도 한편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이 본심이지 않을까요?


  학교폭력예방법이 학교폭력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유일한 방식이자 절차는 아닙니다. 이 법이 학교폭력이라는 공식 용어를 만들었지만, 학교폭력이라는 말이 없을 때도 학교폭력은 있었습니다. 그때도 학교폭력을 처리하던 방식은 당연히 있었겠죠. 가해학생에 대한 징계는 학교에 마련된 ‘학교생활교육위원회’에서 처리합니다. 징계처분 중 퇴학 조치에 대한 재심은 시․도 교육청의 ‘학생징계조정위원회’에서 담당합니다. 법적 처벌이나 손해 배상 등은 법원의 소송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학교폭력예방법이 그 명칭으로 인해 학교폭력 사안을 전담하는 것처럼 오해받는 것 같습니다. 학교폭력예방법의 정식 명칭은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입니다. 학교폭력예방법의 본질은 예방과 대책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책은 피해학생의 보호와 가해학생의 선도․교육입니다. 학교폭력의 대책은 예방 효과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결국 학교폭력예방법은 학교폭력 사안의 시시비비를 가려 피해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가해학생을 처벌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학생을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육성하기 위한 보호 장치이자 선도․교육의 법적 근거인 것이죠. 심의위원회는 학생 및 보호자의 신문고申聞鼓나 법원으로 바라봐서는 곤란합니다. 학교폭력을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으로 살피려는 게 본질이 아닌 것이죠. 학교폭력예방법과 심의위원회는 학교폭력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는 법적 울타리이자 교육의 기회로 기능해야 합니다. 심의위원회는 말꼬리를 잡는 진실게임이 되거나 옳고 그름의 정도로 승패를 판정하는 곳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심의위원회는 법원보다는 학교에 가까운 곳입니다. 방식은 법원과 닮았지만, 그 의도와 목적은 학교의 역할을 지향합니다. 누가 먼저 때렸는지를 따지기보다 결국 모두 폭력으로 감정을 드러냈다는 점에 주목하고 반성해야 하죠. 누가 더 잘못을 많이 했는지를 살피기보다 결국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각자를 성찰해야 합니다. 상대 학생을 2대 때린 자녀 옆에서 ‘3대 때린 것 아니라니까요! 2대예요.’라고 항변하는 보호자를 마주할 때면 제 얼굴이 화끈해지기도 합니다. 자녀에게 사안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요?]




  우리의 인식부터 달라진다면 심의위원회의 조치를 단순히 강약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자신이 받은 조치가 과하거나 상대가 받은 조치가 약하다고 불복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먼저 생각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있지 않을까요? 보호자라면 자녀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느끼도록 해야 할까요? 심의위원회의 가해학생 조치는 징계나 처벌이 아닙니다. 심의위원회의 조치가 사안의 마무리인 것도 아닙니다. 학생의 학교생활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상대 학생과 마주치지 않더라도 또 다른 학생과의 관계가 생길 겁니다. 학생은 결국 학교 바깥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끊임없이 타인과 만나야 합니다. 심의위원회 전후의 과정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량과 태도를 배우고 기르는 기회여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심각한 학교폭력 사안에 대한 경각심을 거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다수 사안에서 마주하는 ‘법대로 합시다!’와 같은 인식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학교폭력 해결을 위한 묘안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심의위원회는 그나마 사회적으로 공들여 다듬어가고 있는 소중한 한 방안입니다. 이 방안이 흐지부지되거나 본질을 떠나 산으로 간다면 우리 모두에게 안타까운 상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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