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심의센터 이야기
‘기피忌避’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꺼리거나 싫어하여 피함’으로 되어 있더군요. 이는 학교폭력 사안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안 관련자의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표현이든 사안의 기저에 흐르는 맥락적인 의미이든 누군가를 기피하는 상황은 학교폭력 안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학교폭력 사안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학교폭력으로 인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이든 학교폭력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심의위원회에서도 들을 수 있는데, 이때의 ‘기피’는 법률 용어의 의미와 유사합니다. 법원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법관이나 법원 직원이 한쪽 소송 관계인과 특수한 관계라거나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다고 여겨질 때 다른 쪽 소송 당사자가 해당자의 직무 집행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법원의 재판이 아무리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결국 사람의 일이다 보니 편파적이거나 주관적으로 행해질 여지를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겠죠. 실제로 불공평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우려나 의심을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기피 제도는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를 높이는 조치일 수 있겠네요. 특정인의 참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일상 용어에서의 ‘기피’와 마찬가지로 법률 용어의 의미도 다소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만, 그 의도나 효과를 생각하면 훨씬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이 큰 것 같습니다.
심의위원회에서 사용하는 ‘기피’도 일종의 법률 용어입니다. 사안 관련자가 심의위원회에 참석하면, 위원장으로부터 기피 신청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는데요. 대개 질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현재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참석 위원 중에서 이번 심의에 대해 공정한 심의를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위원이 있습니까? 있으면 기피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교폭력 피‧가해 관련 보호자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대다수 보호자는 “없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답합니다. 또 다른 보호자는 질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죠. 그런데 간혹 두 경우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 일도 생깁니다. 위원장에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할 수 있냐?”라며 따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위원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항의하기도 하죠. 재판에서 소송 당사자는 법관의 성향 등 사전에 정보를 파악하여 판사를 기피할 수 있으며, 구청에서도 민원 실명제를 실시하여 이용 주민들이 직원의 정보를 알 수 있는데, 심의위원회는 위원 정보를 비공개로 하면서 기피 제도를 형식적이고 부실하게 운영한다는 식으로 조목조목 지적하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동의하는 이야기입니다. 심의위원들의 개인정보는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거든요.
처음 심의위원회 업무를 할 때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중 하나가 기피 제도였습니다. 당사자가 위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당일 참석하여 갑자기 기피 여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인데, 사안 관련자가 이에 대해 질문이나 항의를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되었습니다. 주위에 물어봐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실효성 없는 형식이었고, 법적으로 만들어진 절차이다 보니 찝찝하지만 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 기막혔던 건 심의위원회가 2020년 3월부터 시행되었다는 점이죠.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해였습니다. 심의위원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심의위원회 당일 확인한 위원의 얼굴밖에 없는 셈인데, 그마저도 마스크를 쓴 모습이었던 겁니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 기피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죠.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당사자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황당하며 화가 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고 심의위원들의 개인정보를 임의로 밝히기도 어렵습니다. 학교폭력 심의 업무는 전국에서 동일하게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 별개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학교폭력예방법 제21조 3항에 관련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법률에 의하면 심의위원회의 회의는 비공개입니다. 추후에 피·가해학생 또는 보호자가 심의위원회 회의록 공개를 신청할 수 있는데, 이때 위원의 성명 등 개인 정보에 관한 사항은 제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심의위원회 이전이나 회의 중에도 개인정보는 비공개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만 떼어놓고 본다면 기피 제도와 충돌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원칙을 바꿔야 할까요? 이때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민원에서 법관이나 지자체 직원 사례를 심의위원과 비교했었습니다. 심의위원을 그들과 동일한 잣대로 볼 수 있을까요?
심의위원은 교육지원청 소속의 직원이 아닙니다. 무슨 특별한 내부 기밀이 아니라 학교폭력예방법에 버젓이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학교폭력예방법 시행령 제14조에 의하면, 심의위원회의 위원은 각 교육지원청에서 임명하거나 위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학교폭력 사안의 심의를 위해 외부에서 모셔온 분들인 겁니다. 이때,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법률에 명시된 조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해당 교육지원청의 생활지도 업무 담당 국장 또는 과장, 지자체의 청소년보호 업무 담당 국장 또는 과장, 교원으로 재직하고 있거나 재직했던 사람으로서 학교폭력 업무 또는 학생생활지도 업무 담당 경력이 2년 이상인 사람, 교육전문직원으로 재직하고 있거나 재직했던 사람, 학부모, 판사‧검사‧변호사, 해당 교육지원청 관할 구역의 경찰서 소속 경찰 공무원, 의사 자격이 있는 사람, 대학의 조교수 이상 또는 청소년 관련 연구기관에서 이에 상당하는 직위에 재직하고 있거나 재직했던 사람으로서 학교폭력 문제에 대하여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 청소년 선도 및 보호 단체에서 청소년보호활동을 2년 이상 전문적으로 담당한 사람, 그 밖에 학교폭력 예방 및 청소년보호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심의위원회는 이러한 조건에 합당한 사람을 10~50명 범위에서 구성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의위원은 학교폭력 관련 지식이나 경험을 갖춘 여러 분야의 외부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죠. 이분들은 교육지원청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직업이나 일을 갖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개인적인 생업을 하다가 심의위원회가 있을 때마다 교육지원청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심의위원회를 할 때마다 매번 모이기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심의위원회가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교육지원청에서는 관할 초‧중‧고의 학교폭력 사안을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이다시피 심의위원회가 개최됩니다. 50명의 심의위원이 학교폭력 심의를 위해 매일 교육지원청에 모이는 게 가능할까요? 당연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법률에서는 5~10명 범위의 소위원회로 나누어 운영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각 교육지원청은 여러 개의 소위원회를 마련해 두고 순환 운영합니다. 50명의 심의위원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가 있다고 하면, 10명씩 5개의 소위원회를 만든 후, 요일별로 돌아가며 운영하는 식입니다. 사실 어떤 식으로 운영하든 심의위원회 개최일에 참여 가능한 위원을 일일이 섭외해야 합니다.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죠. 심의위원 개인정보 공개의 문제입니다. 조금 더 살펴본다면, 심의위원을 여타 공직자들과 동일하게 볼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살펴봤듯 심의위원은 학교폭력 심의 업무를 위해 교육지원청에 고용된 직원이 아닙니다. 각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교육지원청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위촉된 외부 인사입니다. 위원의 임기도 2년으로 정해져 있죠. 위원 스스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의사를 밝히는 경우에는 해촉할 수도 있습니다. 심의위원은 공직자와 같은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공직자는 아니며,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위원 중에는 공직자도 포함될 수 있으나, 이는 개별 신분으로 따져야 할 일입니다.
심의위원의 책무는 심의위원회 업무에 국한합니다. 그들이 심의위원회 바깥의 일상에서도 심의위원으로서 제약 또는 영향을 받는 건 심의위원회 관련 내용의 비밀 유지 정도입니다. 심의위원은 그들에게 부차적 활동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심의위원의 정보 공개는 심의위원회의 공정성 자체를 그르칠 수 있습니다. 또한, 심의위원 입장에서는 개인으로서 보호받을 필요와 권리를 가져야 합니다. 심의위원회는 관련자들의 요구와 하소연 속에서 진행되며, 심의 이전과 이후에도 온갖 지적과 시시비비에 휩싸입니다. 심의위원이 일상에서도 학교폭력 사안 판단과 조치 결정에 대해 일방적 비난과 추궁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선 안 되겠죠. 심의위원에게 사안 전후의 무한 책임을 요구한다면 개인적 권리와 보호를 운운할 것도 없이 심의위원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누구도 심의위원을 선뜻하려고 하지 않겠죠.
실제로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사안 관련 보호자가 심의위원을 향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거나 위협적인 언행을 하기도 합니다. 빈번한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경우가 ‘존재한다’는 게 중요하겠죠. 한 번은 피해 관련 학생의 아버지가 심의위원을 향해 ‘그러한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냐!’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당장 고소하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죠.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적법성 여부나 대응 방안을 논하기 전에 이러한 상황 자체를 겪어야 하는 심의위원에 대한 안쓰러움이 먼저 생기더군요. 눈앞에 당장 벌어지는 일들을 담당자로서 마땅히 제지할 수단이나 장치가 없다는 데 대한 무력감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절차와 방식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심의위원회 진행에 차질을 빚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단순히 그분에 대한 원망이라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자녀의 일들로 인해 벼려지고 뾰족해진 심정 탓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무관한 이에게 울분을 전가하는 게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학교폭력이라는 불행을 함께 고민하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심의위원이 그 대상이라면 더욱 공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의위원이 누구의 편을 들거나 사안을 일부러 왜곡할 일은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사안 관련자가 심의위원의 생각을 오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심의위원을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 맞서는 대상으로 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피해 관련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의심하고 축소하려는 사람으로, 가해 관련자는 자신의 잘못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처벌을 하려는 사람으로 심의위원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심의위원에 대해 알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