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

조각 난 마음을 녹여 새로운 형태로 붙여주는 글

by 한서밀

글 쓰는 모습은 얼핏 보면 -특히 책상과 주변이 깔끔할수록- 한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 쓰는 마음은 대개 한적하지 않다. 의문스럽거나, 슬프거나, 불안정하거나, 고통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일 때의 글쓰기가 즐겁고 기쁜 날의 글쓰기보다 많지 않을까.


남들에게 좋은 작품을 알리는 글, 취미생활과 관련된 글은 기분 좋은 상태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조각 난 마음을 녹여 새로운 형태로 붙여주는 글, 그래서 인생에 대해 보다 유연한 시각을 갖게 하는 글은 납득할 수 없었던 일을 굳이 돌이키며 써냈을 때 나오는 것 같다. 남들은 그저 잊어버리고 앞만 보라고 할 일을 꾸역꾸역 기억해내며 의미를 찾으려는, 혹은 다른 차원에서라도 이해해 보려는 몸부림은 쇠락한 금광 근처의 하천에서 나 혼자 사금을 채취하려고 계속 채를 들고 흔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 방이 여름의 서재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읽고 쓴 글은 바로 그런 글이었다.


좋은 글은 독자에게 언어를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마음에는 그것을 세상에 표출할 수 있는 말을, 혼란스러운 감정에는 그것을 뚜렷하게 구분해 줄 ‘감정의 명칭’을 찾으면 고통이 잦아든다. 상황에 적합한 언어가 고통을 ‘다룰 수 있는 문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타인의 글에서 내가 할 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글의 저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우울이 내 심신을 움켜쥐었을 때 나는 책 읽기를 힘들어했다.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고, 다시 독서에의 길을 터준 것이 나와 같은 시간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작가들의 진솔한 에세이였다. 이 넓은 세상에 나만 이 문제로 속앓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하루, 한 달, 한 해 더 살아볼 엄두를 내게 했다. 그래서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만큼 집중력과 지성,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긴다면 나도 그런 글을 써서 내가 도움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에 맞는 문장을 주고 싶었다. ‘할 말’을 나누고 싶었다.


20220130095058_lbdggfua.jpg


잔뜩 구겨져서 뭉쳐 있는 우울의 시간을 다림질하고, 다시 해상도를 높여 과거를 기억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울증의 흔한 증상 중 하나는 기억력과 집중력 저하이기 때문이다. 애써 기억해낸 개인사를 글의 의도에 맞게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 글과 나의 밀고 당기기도 으레 있는 일이었다. 우울에 너무 취해서 글을 쓰면 자기 연민으로 가득 한 푸념이 될 것이고, 내 얘기를 너무 가리면 누군가와 공감하기에 너무 밋밋해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글이 될 게 뻔했다. 더군다나 에세이는 내가 처음 쓰는 장르의 글이었다. 내 의도가 전달되기에 적절한 나와 글의 거리, 나와 독자의 거리, 나와 세상의 거리를 새롭게 익히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다.


내게 위로를 주던 바로 그런 글들을, 누군가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직접 써 보기까지 오랜 독서의 시간이 있었으며, 또 오랜 필사(筆寫)의 시간도 있었다. 주로 새벽과 아침, 나는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내게 피와 살이 될 문장들을 필사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생활하는 방에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노트북을 여는 것만으로 서재 겸 작업실로 변하는 나의 방은 조금 더 애틋한 공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