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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Oct 15. 2024

툴루즈-로트렉, 벨 에포크 밤의 일원

몽마르트의 별

코엑스 인근의 한 빌딩 지하에는 알찬 전시와 기획력으로 조용히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도심 속 미술관이 하나 있다. 바로 마이아트뮤지엄이다. 2019년 개관한 이래 누적 관람객 120만 여 명을 동원한 이 미술관의 강점은 전시 기획력이다. 전시 주제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서도 감상자에게는 부담스럽지 않고 재치 있게 내용을 전달하는 전시 연출이 매력적이라 이곳에서 주관한 여러 전시를 관람했다. 


올 가을 다시 마이아트뮤지엄을 찾은 것은 벨 에포크의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인 툴루즈-로트렉의 그림을 보기 위함이었다. 마이아트뮤지엄의 새 전시 소식을 보고 몇 해 전에 놓친 로트렉 전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꼭 그의 그림들을 감상하겠노라 다짐했었다. 참고로 마이아트뮤지엄의 <툴루즈-로트렉 몽마르트의 별> 전시는 2025년 3월 3일까지 계속된다.   



1864년 프랑스 알비의 툴루즈 백작가에서 태어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10대에 두 번의 다리 골절 사고를 겪으며 양쪽 다리의 성장이 멈추게 되었다. 귀족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오랜 근친혼의 영향으로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몸에, 장애로 인한 상체와 하체의 불균형 때문에 그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귀족 집안의 장남이었지만 신체의 장애 때문에 승마 등 귀족들의 활동에 쉽게 편입될 수 없었던 그는 그림에 몰두했다. 로트렉이 애착을 갖고 그린 대상은 파리 벨 에포크의 밤문화와 그것을 이루는 사람들이었다. 몽마르트 골목의 술집 겸 공연장인 카페 콩세르를 채우는 배우, 가수, 무용수, 손님들, 그리고 매춘부들까지. 로트렉은 화려함과 저급함, 활기와 퇴폐가 뒤섞여 있는 파리의 밤을 자신만의 필치로 화폭에 옮겼다. 그에게 벨 에포크의 밤문화는 탐구할 대상이자 자기 생활의 일부였는데, 문제는 이 문화의 향락성에 있었다. 알콜 중독과 무분별한 매춘 때문에 병 든 그는 1901년 30대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가 겪었던 소외와 이른 죽음 탓인지 미디어에서 툴루즈-로트렉을 다룰 때면 그 인생의 비애가 두드러지곤 했다. 이에 마이아트뮤지엄은 <툴루즈-로트렉: 몽마르트의 별> 전시에서 로트렉의 석판화 포스터를 중점적으로 소개하며 이 작품들에서 로트렉의 예술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고 밝힌다. 


이번 전시는 로트렉의 심리적 결핍과 비운의 생애를 강조해온 이전의 경향을 벗어나 그의 예술을 새로운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신체적 장애를 크게 개의치 않고 사람들과 교류를 즐긴 그의 호방함, 어떠한 유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인 그의 보헤미안적 실험정신, 특히 화려함과 저급함 이면의 인간미를 관찰했던 그의 휴머니즘을 강조하고자 한다.


전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보헤미안, 2부 휴머니스트, 3부 몽마르트의 별, 4부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이다. 


1부에서는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고 당대 유행하던 예술적 요소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적극적으로 활용한 툴루즈-로트렉의 석판화 포스터들을 보여준다. 화가, 석판화가, 삽화가였던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해 준 것은 바로 ‘라 굴뤼’ 포스터였다. 몽마르트 골목골목의 밤문화 업장들인 술집 겸 공연장, 댄스홀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로트렉은 가게 주인, 배우와 가수, 무용수 등 여러 문화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가게나 공연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를 의뢰받곤 했다. 그중 물랭 루주의 유명 무용수 라 굴뤼를 더없이 역동적으로 담은 이 포스터는 많은 이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이것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애호가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1부에 전시된 툴루즈-로트렉의 석판화 포스터들에는 당시 화가들에게 유행했던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이 보인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풍속을 담은 판화로, 일본이 서구에 개항하며 도자기 등을 수출할 때 상품이 깨지지 않도록 넣는 포장 완충재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껏 서구 예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과감한 색의 사용이나 제한 없이 잘라내는 구도, 서구 예술가들이 잘 택하지 않았던 장면 같은 요소들이 유럽 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로트렉의 석판화 포스터에서는 우키요에의 영향이 ‘크로핑’으로 가장 잘 나타난다고 느껴졌다. 그가 그린 <잔 아브릴> 포스터의 한편에 과감하게 크롭된 연주자의 손과 악기 윗부분이 그렇다. 이렇듯 로트렉 석판화에서 엿볼 수 있는 우키요에의 영향은 로트렉이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았을 뿐 동료 예술가와의 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툴루즈-로트렉, <잔 아브릴> 


‘보헤미안’ 파트에서 또 하나 눈 여겨볼 만한 점은 로트렉 포스터에서의 서체 활용이다. 출판법이 개정되며 포스터의 부흥기를 맞은 파리에서, 서체를 단순히 활자로만 두지 않고 그래픽적 요소로 재치 있게 활용한 화가

는 바로 로트렉이었다. 아래 첨부된 아리스티드 브뤼앙의 극장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에 나타난 서체의 활용을 보라. 정보 전달 뿐만 아니라 서체마저도 작품의 일부 같이 감각적이고 장식적으로 느껴진다. 다른 석판화에서 활자는 인물의 머리 등에 간혹 가려지기도 하는데, 이런 연출은 오늘날의 잡지나 포스터 디자인에도 여전히 활용된다.   


툴루즈-로트렉, 곧 있을 아리스티드 브뤼앙의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


전시 2부와 3부에서는 툴루즈-로트렉의 인간적인 면이 더욱 강조된다. 2부 ‘휴머니스트’에서는 예술계의 인물들 외에, 어쩌면 파리의 밤문화에 빠진 적이 없었을 테지만 도외시되거나 대상화만 되었을 매춘부들과도 인간적으로 교류한 로트렉에 대해 다룬다. 3부에서는 건강이 악화된 툴루즈-로트렉이 과거의 추억과 상상에 기대어 계속 그림을 그렸던 시기를 보여준다. 로트렉은 병상에서 친분이 있던 배우의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관람했던 서커스의 장면들을 계속해서 그렸다. 


2부에서는 배우, 가수 등의 공연 홍보 포스터와 매춘부들의 일상을 담은 판화집 <엘르> 속 작품들에 대해 다룬다. 2부를 알리는 설명 패널을 보면 2부 작품들 중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엘르> 판화들이다. <엘르>에서 로트렉은 그들을 성적으로 유혹적인 모습으로 포착하지 않았고 그들의 일상 생활자로서의 모습들을 담담히 담아냈다. 하지만 2024년을 살아가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어쨌든 인권을 사고 파는 거래에서 고객인 동시에 친구인 게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솔직히 혼란스러웠고 잘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을 담았다지만 이 판화집 역시 소위 ‘신사 분들’을 예상 구매자로 정하고 만든 것이니까 어폐가 있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로트렉의 계층 구분 없는 교류와 그것에 대해 휴머니스트라 이름 붙인 2부의 기획 의도에 대해서는 4부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 섹션을 다 보고 나서 전시 전체를 곱씹으면서 더 와닿기 시작했다. 당시 황금기를 맞았던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 작품들과 여러 화가의 화풍을 보다 보니 로트렉 포스터만의 개성이 눈에 더 밟혔던 덕분이다.  


툴루즈-로트렉의 휴머니즘이 맞물려 빚어낸 예술의 비범함을 탐구하는 본 전시는 그가 몽마르트에서 탄생시킨 불후의 매혹적인 작품과 로트렉과 함께 동시대 프랑스  포스터 황금기를 이끈 알폰스 무하, 쥘 세레, 테오필-알렉상드르 슈타인렌을 포함한 13명의 작품을 망라하는 159점의 석판화 명작을 선보인다. 


흐르는 듯한 선, 장식적인 요소, 그리고 구도 연출 등에서 느껴지는 우키요에의 영향 등 공통점도 있지만 화가마다 그림체와 개성이 다 달랐다. 포스터를 디자인할 때 각자 중하게 여기는 지점 또한 화가마다 달랐다.


4부에서 여러 작가의 포스터를 선보이고 있지만 이해를 위해 이중 제일 유명하면서 툴루즈-로트렉과 화풍이 상이한 알폰스 무하와 쥘 세레를 본 전시의 주인공인 툴루즈-로트렉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아르누보와 예술적인 상업 포스터의 거장 알폰스 무하의 경우 상품 광고 포스터이더라도 환영적이고 환상적인 배경에 인물과 광고 대상의 관련물들을 배치시킨다. 쥘 세레 포스터 속 여자들은 아름답고 경쾌하고 보는 사람을 웃게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개성적이고 구체적인 사람 같기 보다는 쥘 세레 손끝의 미인들 같은 경향이 있다.(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쥘 세레의 미인들이 너무 좋았다. 특히 그가 그리는 노란색 치마폭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쥘 세레, 물랭 루주에서의 무도회를 알리는 포스터


이에 비해 툴루즈-로트렉의 포스터는 보다 현실의 한 순간 같고 덜 장식적이다. 그리고 보다 익명의 모델이 아니라 실제 공연장의 주인, 실존 배우와 무용수 등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 많아 포스터 속의 인물들이 훨씬 개성적이다. 애초에 그 사람들을 직접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였다 보니 이는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툴루즈-로트렉의 판화집 <엘르> 속 판화 한 점. 목욕을 준비 중인 여인. 

 

이런 측면에서 2부의 판화집 <엘르>로 다시 돌아가보도록 하자. 물론 이 작품은 매춘부 개개인을 홍보하는 포스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로트렉이 그들을 일상 속의 개인으로 받아들였고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로트렉의 일기를 본 적은 없지만 그가 매춘부들을 벨 에포크 밤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는 추측을 해 본다. 툴루즈-로트렉이 장애를 입은 이후로 귀족 사회에 쉽게 섞이지 못했다지만 그의 태생이 귀족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파리 벨 에포크의 관망자나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자신부터가 그 밤의 일원임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파리의 밤에 있던 사람들을 관찰하고 대하는 로트렉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툴루즈-로트렉에 대해 더 읽고 찾아보며 그가 다른 소수자들 역시 과장이나 대상화 없이 그렸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의 그림들을 더 보다 보면 이번 전시의 2부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로트렉이라는 한 명의 예술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겠지. 그의 그림과 그 그림들에 드러나 있을 그의 자아와 소속감이 더 궁금해지는 전시였다.  

 

벨 에포크 당시 카페 콩세르의 사람들을 담은 사진

 

* 글에 첨부된 작품 이미지들은 미술관 측에서 제공한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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