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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유니 Jan 11. 2023

01.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영국의 주택가를 산책하다 보면 다양한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영국집은 가든이 있는 2충 집들이 많은데, 단독주택 형태의 Detached house가 있고, 두 가구가 절반씩 사용하는 Semi-detached house가 있다. 그 밖에도 3개 이상의 주택이 붙어 있는 Terraced,  1층 단독 주택인  Bungalow와 한국의 아파트나 빌라 형태의 집을 Flat이라고 한다.


이민 초기에 우리 가족은 주로 빌라 형태의 Flat에 살다가 단독주택인 Detached house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정말 큰 가든이 있었는데, 여름에 잔디를 관리하는 일이 매~우 번거롭긴 하였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좋은 놀이터였다. 우리는 가든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고, 배드민턴도 치고, 겨울에는 불을 피워 놓고 불멍을 하기도 하였다.

군고구마를 먹으며 불멍을 즐겼다.
눈이 온 날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기분 좋게 주방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여우 한 마리가 우리 가든에 들어오는 것을 봤다. 영국에서는 여우를 보는 것이 흔한 일이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여우가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가든 한쪽의 장미 나무 옆에 웅크리고 앉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여우의 입주 신고식인지 몰랐다. 아무튼 그날로 그 여우는 우리 집 가든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주방에서 가든이 제일 잘 보인다.

가끔씩 산책을 하다가 지나가는 여우를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깝게 여우를 본 것은 처음이어서 나와 아이들은 너무 신기했다. 아이들은 여우가 제일 잘 보이는 주방 창문에서 가든을 내다보며 여우가 있는지 없는지를 계속 확인하고, 여우가 무엇을 하는지 서로 알려주기에 바빴다. 그렇게 이틀 정도 지나서는 급기야 여우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다며 빵과 사과를 가져다가 던져 주고 왔다. 여우는 잡식성이라고 하더니 우리가 주는 빵과 과일을 너무 잘 먹었고, 언젠가부터는 우리가 가든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팔딱 일어서서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우는 저녁때쯤 되면 사라졌다가 다음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 녀석도 우리 가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우와 우리의 물리적 거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부엌 창가의 블라인드를 올리면 이미 여우가 창문 바로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굿모닝~"하고 인사하고는, 곧이어 "뭐 좀 줄까?" 하고는 과일을 던져 주고 들어왔다. 귀를 쫑긋 거리며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 큰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고양이처럼 폴짝 거리며 뛰어다니는 여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여우에 홀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여우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부터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언제부턴가 가든에 나가면 쾌쾌한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불쾌한 그 냄새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빨래를 널러 가든에 나갔다가 '미끄덩'하고 그 녀석의 배설물을 밟은 후에야 이 불쾌한 냄새의 주인공이 여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여우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 녀석은 잠시 가든에 머물다 금세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먹이를 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든에서 보냈고, 반면에 매일 가든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던 아들은 혼자 나가기 싫다며 집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국 여우들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하더니 가든 구석구석을 자세히 보니 이 녀석이 물어다 놓은 쓰레기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헐...!!


우리가 여우의 귀여움에 홀려 있을 동안 그 녀석은 우리 가족의 소중한 놀이터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당장 그 녀석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제일 먼저 아이들에게 더 이상 먹이를 주지 않도록 하였고, 가족들 중 그 누구의 마음도 약해지지 않도록 가든 곳곳에 퍼져 있는 그 녀석의 배설물과 쓰레기를 함께 치우면서 다 함께 여우를 쫓아내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그 녀석을 기다렸다. 


아침이 되고, 블라인드를 올리자 여느 때처럼 녀석이 나를 빤히 보며 앉아있다. 나는 눈도 안 마주치고는 비장의 무기를 들고나갔다. 가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비장의 무기를 양손으로 흔들며 그 녀석에 다가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놀란 여우가 펄떡 뛰더니 가든 사이의 틈새로 도망가버렸다. "그래, 이제 굿바이다!! 오지 마라!!"


그렇게 아침에 쫓아낸 여우가 점심때쯤 되니 또 어슬렁 거리며 가든으로 들어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또 쫓아나갔다. 두 개의 1.5L 페트병에 작은 돌멩이를 여러 개 넣어 만든 비장의 무기를 하늘 높이 들고 흔들어 큰 소리를 내면서 “GO AWAY!!"라는 메시지를 여우에게 강력히 전했다.


처음에는 놀래서 도망가던 녀석이 하루, 이틀이 지나자 도망가는 척하다가 내가 집으로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는 못된 행동을 보였다. 그 녀석의 작전을 파악한 나도 집으로 들어가는 척하다 그 녀석이 돌아오면 다시 더 큰 소리로 반격을 했다.


여우와 나의 전쟁은 치열했다. 일주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보다 그 녀석은 훨씬 고집스러웠다. 나는 수시로 가든을 확인하고, 여우가 나타나면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 이상한 모션으로 페트병을 흔들면서 그 녀석을 쫓아냈다.


어느 날은 여우가 나타나서 부리나케 나와 페트병을 흔들고 있다가 옆집의 지붕을 고치고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친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놀란 것 같았고, 나는 정말 창피했다.


그렇게 3주 정도가 지난 아침에 블라인드를 올리니 여우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던 여우는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것이 그 녀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여우를 보지 못했다.

그 녀석은 이렇게 자신의 뒤태를 남기고 떠났다.

그렇게 여우는 떠났지만... 나는 페트병 흔드느라 고생한 팔의 근육통이 나아질 때까지 한동안 그 녀석이 생각났고, 진짜 갔나 싶어서 한 번씩 가든 쪽을 쳐다봤다.


아직도 여전히...


비가 많이 오는 날이나, 갑자기 영국에 눈이 많이  얼마 전의 겨울밤에는 문득  녀석이 생각난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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