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의 우당탕탕 여행기
1월 말, 부모님을 모시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여행을 다녀왔다. 약 12일 정도의 긴 일정이었다. 촘촘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빠와, 여유로운 여행을 추구하는 나인지라 한번쯤 진하게 싸우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 또한 가는 김에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모두 경험해보고 싶어 흔쾌히 OK했다.
작년 일본 여행은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고,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온 첫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에 모든 걸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 자유로운 여행을 추구하는 나였지만, 하루 하루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여행사 직원 못지 않게 시간 단위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목적지에 가야할 지 방법까지 세세하게 찾아보고 기록했다. 게다가 어느 것 하나 메뉴가 겹치지 않게 다양한 맛집도 찾아두었다. 밤낮으로 정보를 찾고 계획한 덕에 큰 문제없이 여행을 만족스럽게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모든 것을 꼼꼼히 준비하기엔 12박 13일은 긴 기간이었고 쿠알라룸푸르, 말라카, 싱가포르까지 3개 도시를 여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숙소를 찾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청결과 방음, 괜찮은 가격대, 3인룸 유무, 그리고 관광지와의 거리까지 생각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원래도 꼼꼼하게 숙소를 고르는 나인데, 불면증이 있는 부모님과의 장기간의 여행인 만큼 컨디션을 망치지 않도록 더 좋은 숙소를 선택하고 싶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틈틈이 숙소를 찾아봤다.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자주 사용한다는 그랩을 깔고, 트래블로그 카드를 발급해 등록했다. 좋은 환전 타이밍을 찾아 환전을 하고, 여행자 보험에도 가입했다. 반딧불투어를 원하셨던 부모님을 위해 투어 상품을 골라 문의해 예약하고, 괜찮은 음식점과 관광지도 일부 찾아 보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해내고 있음에도 어딘가 자꾸 부족한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일부 아빠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 홀로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과부하가 왔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행이 시작됐다. 비행기에서 내릴 무렵, 갑자기 엄마가 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하셨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거리다 비행기에서 내렸다. 천천히 점심 식사를 하며 숨을 골라야 할 것 같아, 공항 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그 사이 엄마의 창백했던 얼굴은 조금 혈색을 되찾았고, 그랩을 타고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경. 숙소에 짐을 풀고 야시장에 가려던 계획은 취소했다. 엄마도 몸이 좋지 않고, 나도 감기 기운이 있어 다음 여정을 위해 하루는 온전히 숙소에서 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소파에서 쉬던 나는 문득, 다음 날 타야 할 싱가포르행 버스를 예약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미리 생각해 두었던 '에어로라인 버스'를 급하게 서치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다음 날 오전 버스표가 매진이었다. 일부러 정류장 근처로 숙소를 잡았는데 매진이라니... 이미 다음 날 비싼 싱가포르 숙소를 예약해 두었고, 이미 취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멘붕이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차선책으로 다른 버스를 급하게 알아봤다. 그렇게 '이지북'이라는 어플을 찾았다. 한국에는 이 어플과 버스에 대한 후기가 거의 없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플에 들어가 출발지와 도착지를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로 입력했다. 예상과 달리 정류장이 너무 다양해서 구글 지도에 위치를 하나 하나 서치하며 숙소와 가장 근거리에 있는 곳들로 찾아보았고, 출발지와 도착지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결이 되는 듯 했으나, 추가로 서치하던 후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이지북은 온라인으로 예약할 경우 버스 티켓 출력이 필수'라고 했다. 젠장, 멘탈이 탈탈 털리는 순간이었다.
내 멘탈이 어찌 되었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낯선 땅에서 아빠와 숙소 근처의 프린트가 가능한 곳을 수소문했고, 겨우 매장을 찾아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어플로 버스 티켓을 예약하려는데, 인증번호 발송이 안돼 결제 승인이 나지 않았다. 로밍이 아닌 해외 유심을 별도로 구매해 끼웠더니 문자나 전화가 일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직접 터미널에 가서 티켓을 구매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미 오후 8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으니, 다음 날 오전 터미널에 직접 가서 사는 수밖에. 지금까지 난 뭘한건가, 허탈함이 밀려왔다. 아빠와 매장을 나와 터덜터덜 걸었다. 함께 고생한 아빠에게 너무 미안한 한편, 좀처럼 되는 일이 없는 상황에 짜증이 밀려왔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저녁 식사할만한 곳을 또 찾아야 했다. 숙소에 있는 엄마가 아무것도 못 먹고 있었으니까.
오후 8시 경, 입맛도 없었지만 연 식당도 거의 없었다. 딱히 괜찮은 식당이 보이지 않아 그냥 마트에 들어가 과일을 몇개를 샀다. 그리고 숙소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아빠가 먹고 싶다는 치킨을 하나 주문했다. 포장되어 나온 치킨은 알고 보니 닭다리 하나였다. 어쩐지 값이 싸더라. 나와 엄마는 못 먹을 것 같아서 추가 주문은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왕뚜껑 컵라면과 과일, 그리고 닭다리로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별 기대없이 마트에서 사온 Cherry Plum(체리 자두)를 씻어 한입 무는데, 와... 내 생애 최고로 맛있는 자두였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는데 맛있는 자두를 먹으니 생기가 조금 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4개의 자두를 해치웠다.
조촐한 식사를 앞에 두고 부모님과 '내일 어떻게 할까' 이야기를 나눴다. 싱가포르 숙소를 취소하고 그냥 말레이시아에 있을까? 터미널에 가서 오전에 버스표가 남았는지 확인하고 구매할까? 그런데 표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많은 내가 갈팡질팡하니 아빠가 정리했다. "그냥 내일 오전에 터미널로 가보고 버스표가 없으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 그렇게 다음 날 일정이 결정 됐음에도 나는 밤새 '버스표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버스표가 있어도 버스가 많이 불편하면 어쩌나', '후기에 버스에서 흡연하는 기사도 있다던데, 냄새나서 비위약한 엄마가 구역질하면 어떻게 하지' 등등 별별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걱정하느라 잠을 설쳤다. 게다가 밤새 감기 기운은 점점 심해져 온 몸에 열이 올랐고, 이따금 열이 식으면 몰려오는 한기에 온 몸이 덜덜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