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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anone May 16. 2021

건축가, 퇴근 후 그림을 그리는 이유

독일에서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나는 퇴근 후에 그림을 그린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아이를 재우고 나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고맙게도 가족들 또한 하루 한 시간 정도의  나의 취미 활동을 적극 지지해준다.

 

서재에 앉아 머리에 떠오르는 오늘의 생각들을 더듬어 나간다. 펼쳐진 드로잉 노트에선 겹겹이 쌓인 잉크 향기가 폴폴 풍겨온다. 만년필을 꺼내어 그림 그릴 준비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첫 번째 선을 긋는 것은 나에게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작이 중요한 법인데, 나는 그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시작하는 성격은 되지 못한다. 떠오르는 데로 그어본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선을 그어본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선에 종이 위에 쌓여갈수록 잉크 향기는 서제를 채워가고, 고요한 방안은 만년필이 종이를 긁어대는 소리로 가득하다.

이 두 가지에 끌려 수년을 매일 같이 그려가고 있다.

서재 책장 한 칸은 나의 드로잉 노트로 채워진다. 누군가를 위한 그림이 아닌 내가 좋아서 시작한 나를 위한 그림들로 채워진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나의 하루, 일주일, 한 달이 담긴다. 일기와 다를 바가 없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그날의 기억이 그림과 함께 떠오른다. 나에게만큼은 글로 적힌 일기보다 더 선명한 그날의 기억을 보여준다.

 

사실 나는 한국의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이후에 뜻이 있어 독일로 건너와 건축 공부를 새로이 시작했다. 크기만 달랐지 다른 이의 구미에 맞게 튼튼하고 매혹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다를 바 없더라. 직업 특성상 남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업무 중 나의 그림은 간략히,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리는 행위가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나는 퇴근 후에 서재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실수로 가득해도 내 그림이니 상관은 없다.

내 생각을 담고, 기분을 종이에 담는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즐겁고, 만년필 뚜껑 열리는 소리에 기분이 좋다.

그렇게 하루 한 시간은 내 기억들을 온전히 머금고 책장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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