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I 바다는 잘 있습니다
한 줄 요약 내용이 난해하지 않고, 언어가 어렵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는 게 즐거운 시집
개인적으로 현대시 중에서 읽기 쉬운 편이라고 생각해서,
주변에 시집 선물할 일 있으시다면 이병률 시인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 추천합니다.
하트시그널2에서 임현주가 김도균에게 선물했던 시집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특히 '사람이 온다'가 유명하다. 프로그램 속에서 본 '사람이 온다'는 시는 사랑 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집 안에서 본 '사람이 온다'는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같았다.
시집 전체의 맥락 안에서 단순한 사랑 시 같지만은 않았다.
인간을 향한 사랑같이 느껴졌달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서 비로소 '우리'가 만들어지는 사랑 이야기
시인의 말
어쩌면 운명에 의해
아니면 안 좋은 기운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시
그럼에도 산에서 자라 바다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은 이 나무는,
마음속 혼잣말을 그만두지 못해서
그 마음을 들으려고 가는 중입니다.
2017년 9월
이병률
<하트시그널2>에서 언급된 '사람이 온다'
시인은 한 사람이 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설명하고 있다. 운명을 믿는 사람이라면, 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 일 거라 본다. 그리고 운명의 상대를 만난 사람이라면,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다"는 문장에 큰 울림을 받을 것 같다.
사람이 온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추천 작품 왜 그렇게 말할까요
왜,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따뜻하게 만드는 그 언어가 정말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하지만, 시 제목처럼 정말 현대에는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둥둥 떠다니며 주변을 맴돌고 있다. "말은 마음에 남지 않으면 신체 부위 어디를 떠돌다 두고두고 딱지가 되려는 걸" 모른다는 듯이 내뱉는 사람들 때문에.
왜 그렇게 말할까요
우리는, 우리는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렇게 말한 후에 그렇게 끝이었다죠
그 말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절대 겹치거나 포개놓을 수 없는 해일이었다지요
우리는 왜 그렇게 들어놓고도
그 말이 어떤 말인지를 알지 못해 애태울까요
왜 말은
마음에 남지 않으면
신체 부위 어디를 떠돌다
두고두고 딱지가 되려는 걸가요
왜 스스로에게 이토록 말을 베껴놓고는 뒤척이다
밤을 뒤집다 못해 스스로의 냄새나 오래 맡고 있는가요
잘게 씹어 뼈에 도달하게 하느라
말들은 그리도 억센가요
돌아볼 일을 만드느라 불러들이는 말인가요
대체 그말들은 어찌어찌하여
내 속살에다
바늘과 실로 꿰매 붙여 남겨놓는단 말인가요
시인의 생각이 드러나는 시 '이 넉넉한 쓸쓸함'
시인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라고 말한다. '무심함'과 '단순함'도 '오래 바라보'며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서 말이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라는 시구를 보면 이병률 작가는 사람의 힘을 믿는 시인인 것 같다.
이 넉넉한 쓸쓸함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2021. 2. 22.
블로그에 직접 작성한 글을 옮겨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