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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엽수집가 Dec 04. 2023

우린 언제나 인형이 될 수 있다

기예므로 델토로 감독 I 피노키오

간단한 작품 소개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로렌치니가 어린이를 위해 만든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을 각색한 애니메이션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노키오 동화 내용 또한, 각색된 작품이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애니메이션은 '원작'을 읽어 각색의 과정을 거쳐, 스톱 모션 촬영으로 제작되었다. 즉 움직이는 목각 인형 하나하나를 반복 촬영하여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현재 (23.12.04 기준) 넷플렉스에서 볼 수 있다.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Main Trailer


피노키오의 자리

  피노키오는 이탈리아어로 ‘잣송’이란 뜻이다. 피노키오는 잣송이를 심어 자란 나무로 만들어진 목각인형으로, 수호자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극 중에서 피노키오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말하며, 생각하지만 차에 치여 죽더라도 다시 살아 돌아오는, 발이 불타더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목각인형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정말 ‘인간적’이다. 첫 넘버에서 피노키오는 생명을 얻은 후,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과 말을 신기해한다. 마치 처음 발걸음을 뗀, 처음 표현하기 시작한 아이들이 즐거워하듯 말이다.


  하지만 목각인형 피노키오는 타인의 눈에는 그저 ‘도구’로 보였다. 극단장의 눈에는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로, 군사단장의 눈에는 절대 죽지 않는 ‘최강 병사’로 보였다. 영화의 중반부(상영시간 1시간쯤)에 피노키오는 극단과 함께 아빠를 떠나고, “안녕, 나의 아빠” 넘버를 부른다. 이때의 피노키오는 반짝이는 조명 아래,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하듯이 감격에 차올라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뒤이어 보이는 ‘전진하자, 승리를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의 피노키오는 정제된 움직임만을 보인다. 가짜 미소로 연극을 마친 뒤, 피노키오는 어두운 무대 뒤편에서 지친 표정을 짓는다. (1:04:52)



삶과 죽음의 자리

  피노키오는 현실(인형의 사명)에 순응하기도, 또다시 자신을 찾아 나만의 무대를 하기도 한다. 삶이 인형처럼 다뤄지는 순응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디딘다. 피노키오는 극단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제대로 돈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도구로써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자, 극단장의 입장에서 최악의 공연을 펼친다. 그는 ‘전진하자, 승리를 위하여’ 가사를 ‘방귀 뿡뿡, 변소에서 뿡뿡거리네’와 같이 개사해 웃음을 유발하는 유쾌한, 그러나 총통의 입장에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공연을 펼친다.


  그 결과 수난을 겪는다. 물론 피노키오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목각인형’이기에 죽지 않는다. 수난의 과정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점은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인간이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이처럼 선한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때문이겠지 싶었다.) 그러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피노키오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서사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무사히 구해내고, 함께 세월을 보내다가 그를 먼저 죽음의 세계로 떠나보내는 결말이 그려진다. 실제의 삶이라면 그런 판타지는 없다. 죽음과 삶이라는 자연의 섭리 안에서 인간은 ‘인형’, 즉 선택하는 주체가 아닌 어찌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일

  피노키오의 삶은 인간의 삶과 닮았다. ‘도구’처럼 표정을 잃은 채 살다가도, 어떠한 일을 계기로 또다시 ‘나’를 회복하고, 어떠한 사건에 의해 또다시 ‘나’가 무너지고, 그래도 묵묵히 견디며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불완전한 삶. 결국 영원한 생명을 지닌 인형이든, 언젠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든, 중요한 것은 “영혼이 깨어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이 작품을 만들며 한 장면, 한 장면 심혈을 기울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듯, 내가 수행하는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한다면 살아있는 삶이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피노키오는 아버지가 자신을 만들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옮긴다. 아버지가 피노키오를 만들 당시 그 장소는 천둥번개가 치고, 블루톤으로 그려졌으며, 분노와 슬픔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이는 붉은 노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피노키오의 모습은 피노키오가 탄생할 때 그려진 ELS샷*을 이어 나간다. 분명, ‘대조적’이나 ‘이어 나간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아버지의 슬픈 순간은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피노키오의 힘찬 발걸음은 내 삶의 불씨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 옮겨 붙은 생명의 불씨로 나의 ‘열망’을 잘 지키며 걸음을 옮기고 싶다.



*ELS샷: Extreme long shot.

자연경관과 같은 광범위한 배경을 촬영하여 주변상황을 소개할 때 사용되는 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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