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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엽수집가 Jun 23. 2023

부단히 고된 작업이더라도,
벗어나야 한다

에세이 I 존재의 봄으로서의 카메라와 고정된 시선에 대한 성찰

1. 이전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관하여


  중간고사 이전의 수업에서는 카메라가 소유의 봄으로써 사용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에 그쳤다면, 이후에는 여러 감독의 영화를 보며 존재의 봄으로서의 카메라를 직접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백문이 불어일견이라는 말이 딱 맞다. 영상을 보고 교수님의 설명을 듣자 그간 내가 이해한 소유의 봄은 환상(illusion)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론적 설명에 따르면, 존재의 봄은 보는 자(주체)와 대상의 전도이다. 움직임을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며, 대상을 그 자체(as itself)로 담아낸다.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포착은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에서 시작되었는데, 움직임을 담는 카메라에 익숙했던 내게 그것은 놀랍지 않았다. 당시 관객과 창작자가 경험한 강렬한 전율에도 크게 공감하기 힘들었다. 중간 페이퍼 최설아 학우님처럼 내가 당시의 관객이었다고 상상해도 뜨거운 만남이 그려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존재의 봄을 이해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온전히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한 소유의 봄과 존재한 봄은 이러했다.

소유의 봄은 카메라의 주체가 대상을 고정적으로 그려내므로 폭력적이고, 존재의 봄은 주체가 대상을 비폭력적으로 그려내므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방랑자>에서 모나를 실재하는 그 자체로 바라보게 만드는 존재의 봄 카메라를 몸소 느끼고, 그러한 서사 구조와 카메라에 대한 수업을 듣자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앞선 생각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정성에서 벗어나려는 존재의 봄을 여전히 정형화된 사고에서 이해하고, 창작자를 중심에 내세우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재의 봄으로서의 카메라는 무엇일까, 반성적 사고 끝에 이 질문에 귀착했다. <방랑자>부터 <너의 이름은>까지 작품마다 주목하고 있는 대상이 다르고, 그에 따라 서사 구조와 카메라 연출이 달랐기에 있는 그대로 보는 카메라가 무엇인지 개념화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반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 실천으로 나아가려면, 나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에 작품마다 뜨겁게 만나는 경험을 통해 느낀 존재의 봄에 대한 개인적인 사유를 조심스레 말해보려 한다. 즉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료타가 진정한 부모가 되는 과정 안에서 피를 넘어서는 사랑을 알게 되었듯, 끝이 아닌 과정의 중간 점검으로서 존재의 봄과 그러한 카메라를 정의하겠다.



2. 진정한 존재의 봄과 그러한 카메라는 무엇인가 


  존재의 봄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있는 그대로의 봄은 대상의 포착과 유사하다. 하지만 포착에 대해 생각해보면 모순이 발생한다. 무언가를 포착하면 보는 자의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있는 그대로라고 말하기 어렵다. 존재의 봄 카메라도 이러한 맥락에서 혼란이 왔다. 아무리 대상 자체를 담는다고 하더라도 대상과 앵글, 프레임의 크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창작자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의 봄으로서의 카메라가 존재하는 단어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직접 작품을 감상하자 분명 가능한 시선이자 포착이었다. 존재의 봄 카메라를 통해 만들어진 프레임 내에서는 대상이 우선하며, 창작자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카메라는 도구의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창작자는 그 모든 대상을 무한한 존재로 보기에 그들은 무언가를 한정 짓지 않는 태도로 촬영하려 부단히 노력한다. 예를 들어, <방랑자>에서 아네스 바르다 감독은 모나라는 무한한 존재를 표현하기보다는 보여줌으로써 그녀를 있는 그 자체로 바라보고 느끼게 한다. 특히 거리를 활보하는 모나를 열심히 따라잡지만, 이내 놓치고 마는 카메라를 트래킹으로 연출하며 그녀를 불가사의한 존재로 드러낸 장면에서 그렇게 느꼈다.


  유한과 무한. 카메라뿐만 아니라 서사구조까지 함께 공부하며 유한과 무한에 대한 설명 없이는 정형화하지 않는 존재의 봄, 그리고 그러한 카메라를 정의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서사에서 그렇게 느꼈다. 주인공 파이는 죽음의 위기에 놓여있다 한 섬을 마주하는데, 이때 그의 태도는 로빈슨 크루소와 대비된다. 위기의 순간에 만난 섬을 신의 응답으로 여기며, 그곳에 정착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파이는 섬을 인과적인 응답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자의적인 해석으로 그 섬에 정착하지 않고 다시 바다로 떠난다. 이처럼 유한한 존재인 파이가 무한한 신을 갈망하는 모습만 보이는 이유는 감독이 신이라는 무한 영역의 한정 지을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한과 무한의 공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유한과 무한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신이 아닌 그 어떤 대상이라도 유한을 유한으로만 또는 무한을 무한으로만 두는 행위는 소유의 봄처럼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를 존재로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안 감독이 그러했듯 유한에 그치지 않고, 유한과 무한의 겹침으로 나아가는 포착이 중요하다.


  존재의 봄으로서의 카메라도 유한과 무한의 맥락에서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존재의 봄으로서의 카메라는 무언가를 포착하여 기록하므로 유한하지만, 그것은 대상을 고정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 또 하나의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를 고려해 정의하자면, 존재의 봄으로서의 카메라는 유한과 무한의 결합―있는 그대로 포착하여 기록함으로써(유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무한)―이다. 조금은 복잡하고, 말장난같이 말하자면 존재의 봄 카메라는 유한과 무한이 공존하는 상황을 카메라로 포착하여 유한과 무한이 함께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작자의 태도이다. 유한과 무한의 공존을 그려내는 것은 결국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이때 창작자는 포착하려는 대상을 자기 생각이나 의도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것도 확정 지으려는 태도로 포착하여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이유로 아이러니하게도 작업 주체인 창작자는 앞서 말했듯 프레임 안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존재를 존재로서 바라보게 돕는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수업 때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프레임 내에서 창작자의 위치는 김지현 학우님의 <러브 레터> 감상문에 나왔던 표현인 유한의 영역인 ‘있지 않음’과 무한의 영역인 ‘없지 않음’ 그 사이일 것이다.



3. 존재의 봄의 힘겨움과 고정된 사회적 시선에 관하여


  소유의 봄에서 창작자는 어떠한 덧붙임도 없이 존재를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한다. 한 문장으로 실천 방법을 표현하면 매우 쉽게 느껴지나 실천하기는 어렵다. 한 학기 동안의 탐구를 되돌며 생각해보자 나 또한 그러했기 때문이다. 분명 <리틀 포레스트> 감상문을 쓸 때만 해도 존재의 봄을 느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내 느낌 자체를 서술했었다. 그런데 수업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너의 이름은>을 볼 때는 존재의 봄으로써 보여주는 무한의 영역의 광활함보다 카메라 워크의 분석에 치중해 글을 썼던 것 같다. 그저 경험하는 것보다 영화에 관해 서술하고자 하는 나의 욕심이 더 앞서 그렇게 벗어나려 했던 카메라의 한계에 맞추어 작품을 분석하였다. 여기서 기존의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는 일은 부단히 어렵고, 존재를 그 자체로 보는 행위가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느꼈다. 더하여 경험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깨달았다. 여백이 주는 울림은 표현의 언어화가 본질을 파손할 위험이 있기에 존재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비언어가 주는 울림과 실천의 어려움에 대한 깨달음과 별개로, 반성에 그치지 않고 존재의 봄으로 나가기 위해 앞서 나의 언어로 표현해 보았듯 기존의 고정된 사회적 시선을 살펴보겠다. 고정관념으로 자리한 사회의 시선 중에서도 그 간 인지하지 못했던 ‘SNS적 자의식’과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외모지상주의를 연관해 고정된 시선을 되돌아보았다. 이제는 소셜미디어에 일상을 공유하는 일 자체가 일상이 되었다. 소셜미디어 팔로워 수가 높으면 유료 광고나 협찬을 통해 이익을 얻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웹을 통해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인플루언서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개인적으로 인플루언서는 외모지상주의를 강화했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인플루언서의 탄생은 매스 미디어에 집중되었던 권력을 다수에 분산하고, 누구나 자신을 대중에게 드러낼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는 미디어의 권력 구조를 분해하는 긍정적 효과를 주었으나, 그것보다 더 큰 부작용을 일으켰다. 사회적 시선에 의해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은 자기 사진을 올리며 이전보다 부나 명예를 쉽게 얻게 되었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점점 더 SNS 속 인물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전보다 더 외모에 권력이 부여되었으며, 그렇게 벗어나고자 노력해온 이상주의적 시선이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감성 카페를 찾아가는 등 주객전도가 뒤바뀐 현상을 볼 때면 소셜미디어가 일상에서 타인의 시선을 계속해서 의식하는 자아를 형성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러한 SNS적 자의식은 나의 고유한 존재성을 지우고, 타자의 취향을 자아에 가득 차게 만든다. 


4. 어떻게 일상에서 존재의 봄을 할 것인가


  소유의 봄 카메라가 창작자의 시선이 과도하게 개입되어 문제가 되었다면, 현대 사회의 문제인 SNS적 자의식은 개인의 시선이 자꾸만 타자를 향해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둘의 원인은 다르지만, 정형화된 시선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비슷하다. JTBC2에서 방영한 <악플의 밤>에서 故 설리는 SNS에 올린 노브라 셀카에 달린 악성 댓글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사람들이 본인을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어요?”라는 상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냥 이런 사람도 있다?” 그녀의 대답은 작품을 통해 살폈던 존재의 봄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SNS적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느껴졌다. 기존의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도 한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아가 세상에 나와 다른 다양한 사람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이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 존재의 행태나 외양을 평가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소셜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도 이러해야 한다. 개개인은 각자 고유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신과 SNS상의 타인을 비교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단단한 자아를 형성해야 한다. 또한 소셜 미디어에서 긍정적 효과인 누구나 할 수 있음의 역할이 우선하도록 마주하는 다수의 타인을 평가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에서 존재의 봄을 실천하기 위해 그냥 이런 사람도 있다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나의 삶에 적용하기 힘들 것을 안다. 아무리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고정된 시선에서 존재를 바라보고, 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존재의 봄 실천의 방법으로 ‘자아 찾기’ 운동을 제시하고 싶다. 존재의 봄과 그러한 카메라, 그리고 고정된 시선에 대해 사유하며 자기를 알지 못하면 주변에 휩쓸리기 좋다고 느꼈다. 자아에 대해 무지하면 타인의 시선이나 고정된 인식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그대로 소유의 봄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라는 가장 내밀하며 표현하기 힘겨운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드러내는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대상이든 존재의 봄을 할 수 있다. 나를 둘러싼 성별, 지위와 같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작업은 부단히 고될 것이다. 나를 규정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자아를 표현하는 작업이므로 결국에는 자신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단히 고된 작업이더라도, 나를 한정 짓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외부자적 시선에 균열이 일어난 료타가 그러한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한계에서 깨어날 수 있었듯 존재의 봄을 할 수 있는 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2020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영상문예특강> 기말 리포트

한 학기동안 다양한 작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수업이다. 학기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를 꼽아 개인적으로 탐구하고, 글을 작성하는 것이 기말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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