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수필 같은 여행길

베네치아, 수필 같은 여행길


1.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삐죽삐죽 덥수룩하게 자라난 머리 카락을 다듬어볼 요량으로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있던 이발소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

눅진한 페인트칠이 가뭄에 논바닥 갈라 터지 듯 군데군데 벗겨진 대기의자 끝자리에 앉아 거울 앞에 놓여있는 이발 의자로 옮겨 앉을 차례를 몸이 뒤틀릴 만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어느 계절의 어디쯤이었는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끽끽 끄르륵 끅끅 음산한 신음소리를 연신 뱉어내는 낡은 선풍기 바람이 축축하게 배어났던 땀을 미지근하게 식혀주었던 것 같고, 검붉은 녹 뭉치가 마른 버짐처럼 터져 나온 연탄난로 위에서 주둥이 찌그러진 누런 알루미늄 주전자가 수박 서리 들켜 이웃 마을 입구까지 단걸음에 달아난 사내아이 의 호흡 같은 희뿌연 김 덩어리를 헉헉 가쁘게 뿜어내었던 것도 같다.


어쨌거나 그 자리에서 시간을 때워볼 요량으로 뒤적였던 표지 해어 진 잡지책의 한 페이지에서 그것을 발견하였다. 살아간다는 건 정확한 시점이나 장소를 기억할 수 없는 무수한 순간들을 밤하늘의 별만큼 이나 아무렇지 않게 흩뿌려두고 그것을 하나하나 헤아려가는 일과 같은 것이다.


어쨌든 나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분명 그날, 속 누런 종이에 검게 인쇄되어있던 ‘베네치아’란 네 글자에서 그것을 보았었다고, 분명 그랬었다고 머릿속을 불어가는 바람이 살랑살랑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큰 바다를 건너고 높은 산과 먼 하늘을 넘어와 시골동네 남 정네들의 사랑방이나 진배없었던 꾀죄죄한 이발소의 한구석에서 터벅 머리 사내와 첫 면식을 가진 그 섬 베네치아에서는, 늙은 마법사의 주문 같은 뜻 모를 중얼거림이 새벽호수를 덮어버린 물안개의 환영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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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 핸드폰에 담겨 있던 몇 해 전 베네치아의 풍경입니다.>


그날 베네치아를 향해 일어난 일단의 조바심은 장맛비에 불어난 개울물과도 같아서 방향을 돌리거나 막아설 수 있는 어떤 작은 방법 하나조차 찾아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베네치아는, 언젠가 꼭 가야만 할 ‘나의 그곳’이 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난 그리움의 가지에서는 ‘어떻게든 돌아가야만 할 그 곳’이란 인연의 열매가 맺어져서 한 톨 한 톨 성글어갔다.


인연이란 건 생각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긴 밤을 뒤척이다가 수평선에 걸린 구름이 지난밤에 마시다가 남겨둔 와인빛깔로 물들어가는 새벽을 혼자 맞는 날, 이것저것 마음 급하게 배낭 꾸려 나선 젊은 사내놈의 들 뜬 여행길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꼭 맺어져야만 할 ‘운명적인 인연’이란 걸 믿는 이라면 혹시 베네치아와 나 사이 어딘가에 엮여있는 인연의 끈 한 줄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맺어져있었건 아니면 스스로가 맺은 것이건 간에 지금은, ‘인연은 언젠간 꼭 이루어지기 마련’이라는 가장 통속적인 표현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괴테가 그의 작품 《이탈리아 여행》에서 말한 것처럼 ‘베네치아를 향한 열망이 성숙된 때’에 그 인연을 찾아, 오래 기다려온 잘 익은 발걸음을 디디게 될 것은 그날부터 그렇게 나의 숙명이 되어갔다.



2.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지어낸 몇 가지 버릇에게 본능이란 꼬리표를 붙여가는 막연한 길 걷기 같은 것이다.

또한 그것들 중에 ‘감상적으 로 살아가기 본능’은 늦은 저녁 무렵, 등 뒤에 길게 늘어진 하루 햇살의 마지막 여정처럼 여행지에서조차 질기게 따라다니는 오래 묵혀둔 노트 한 권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언제 적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눈빛과 그것 을 글줄에 담아두려는 긁적거림은 여행지의 좁은 숙소에서조차 떨쳐낼 수 없는 버릇이 되어있다.

이것이 지병이라거나 숙명이라고 한들 아무런 상관없다. 무언가를 세밀하게 읽어내고 그것에 감상과 경험을 버무린 글을 흘려내는 행위는 나의 생존을 증거 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곤돌라, 가늘게 흐르는 물길, 좁은 골목길, 오래된 성전, 마을 광장,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펼쳐놓은 가게, 수많은 여행자들과 그 가슴마다의 사연, 베네치아는 이 모든 것을 빼곡하게 잘 늘어놓은 아름답고 거대한 야외 갤러리이기에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그 물빛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베네치아에선 골목길 어디에선가 행여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해도 막막한 두려움에 몸 떨 걱정일랑은 할 필요 없다.

베네치아의 골목길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귓불을 간질이는 물의 속삭임에 잠시잠깐 가슴을 내어주는 한 순간일 뿐이다.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 가만히 숨을 들이쉰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냄새 맡을 수 있는 것과 맛볼 수 있는 것, 모든 감각의 돌기 를 조밀하게 세워, 읽을거리와 볼거리를 쫓아 나선다.

스륵스륵 결 고운 채로 걸러낸 베네치아의 풍경을 아드리아바다의 코발트블루 잉크로 그려낸다. 읽는 만큼, 보는 만큼, 느끼는 만큼, 하얀 종이 위에 베네치아가 배어 나온다.



수필 같은 여행길


밤새 뿌려진 짙은 안개가

세상 군상들을 잿빛 실루엣에 가둔 새벽,

잠자리 뒤척인 지난 꿈의 방황에서 깨어난다


따뜻하게 내린 찻물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첫 경험 부끄러운 오렌지빛 새벽이

가만가만 창을 넘어선다.


켜켜이 쌓였던 꿈의 잔상을

말간 첫 빛으로 씻어내고

붓쟁이의 그림과 글쟁이의 글과

노래쟁이의 노래를 따라

수필 같은 여행길에 오를 시간이다.


본 내용은 <<베네치아, 낭만과 사색으로의 산책>>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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