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그림쟁이

베네치아의 그림쟁이


수평선 위에 걸려있는 늘어진 구름 사이로 아침 빛이 물을 올리고 있다.

선착장을 따라 길게 난 바닷가를 오르다가, 베네치아의 한 풍경인 것만 같아 어쩌면 여느 날엔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 그림쟁이를 발견한다.

그가 뭍에서 온 이방인인지 베네치아의 현지인인지에 대해서는 물어본 적이 없으니 알지 못한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이 이른 아침의 그는 무언가를 캔버스에 그려 넣고 있는 화가라는 것이다.


20150204_115750.jpg


사실 그의 캔버스에 그려지고 있는 것이 베네치아인지 아니면 그의 추억의 조각인지는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베네치아의 이 바닷가에서, 끝이 뭉툭한 붓을 든 모습만으로도 그는, 한 번도 베네치아를 떠나본 적이 없는 무명의 베네치아파 화가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와 같이 느낌이 끼어들어간 어떤 상황에 대해서는 꼭 분명한 이유가 따라붙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렇게 여행자의 기억에 남아주면 될 뿐이다.


“저 자리를 지켜온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먼 바다 끝에 걸렸던 아침의 빛이 섬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태양으로부터 구불구불 조사된 빛이 아드리아바다 수면에 비스듬하게 걸려든다.


“그의 그림 속에 담겨지고 있는 것은 베네치아의 아침햇살일까, 코발트빛 아드리아바다일까.”


몇 발자국 떨어진 물길 옆을 지나가던 한 여행자가 그에게 다가가 붓 한 자루를 빌린다.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쳐 든 그는 무언가를 긁적거리기 시작한다.

그 여행자의 행위란 게 글을 쓰는 것인지, 글을 그리는 것인지, 지나는 바람에 잠시 눈길 주는 사이에 깜빡 잊어버린다.

글이란 게 쓰는 것이건 그리는 것이건 상관할 바는 아니다. 오늘은 때맞춰 붓을 집어 든 그가 바로 ‘글쟁이’이니.


그림붓을 손에 든 저기에 있는 그는 팽팽하게 당긴 캔버스에 무언가를 그려 넣고 있는 화가이고, 몇 걸음 뒤에서 글붓을 잡아 든 또 다른 그는 구깃구깃한 종이에 또 다른 무언가를 새겨 쓰고 있는 글쟁이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림쟁이의 예술이고 글을 쓰는 것은 글쟁이의 예술이니 그들에게 서로 다른 명칭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베네치아에선 그림과 글, 모두가 베네치아파 예술가의 행위이기에 여행자의 명함에는 ‘베네치아파 예술가’란 직함을 새겨 넣어도 좋겠다.

같은 베네치아파 예술가가 된 동질감 때문일까. 조금 더 큰 붓을 주저 없이 빌려본다.

이왕 부탁하는 김에 물감까지 찍어달라고 한다.

신입 베네치아파 예술가 사내는 코발트블루 물감을 듬뿍 찍은 붓을 마치 촉 굵은 펜인 양 휙휙 휘저으며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베네치아, 낭만과 사색으로의 산책> 중에서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39202434&orderClick=LAG&Kc=


매거진의 이전글베네치아로의 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