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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무채색 스케치, 새벽 카페

파리의 무채색 스케치, 새벽 카페


"파리에선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도 카페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파리의 카페는 가로등 불빛이 아직 어둠을 밝히고 있는 아주 이른 시간에 문을 연다. 눈을 비비며 창 밖을 내려다보면 길 바로 건너편과 그 옆에 맞붙어있는 카페의 실내에서는 깃 잘 세운 말끔한 하얀 셔츠에, 잘 다린 검정 바지 차림의 웨이터가 벌써 손님을 맞고 있다.    


파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카페는 일상이다. 커피포트에 부어 넣은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사이 누군가 카페의 문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누군가 문 밖으로 나온다. 희미한 새벽빛 때문인지 그와 그는, 그인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파리의 카페는 욕망 과잉시대의 순교자로 살아온 그와 그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이윽고 물이 끓고 자동으로 전원 스위치가 내려간다. 빈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내려놓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이다. 행여 어둠이 가실 새라 두툼한 겉옷 하나 대충 걸쳐 입고 가로등 아래를 걷는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불빛은 산등성이에서 나부끼는 억새풀과도 같아서 저 혼자서 쓸쓸하다. 


이를 때면 괜한 허기가 밀려든다.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파리의 새벽 카페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버터 향이 진하다. 노릇하게 잘 굽힌 새벽 크로와상에선 센강이 뿜어내는 새벽 물안개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창가에 붙어 있는 자리에 앉아서 카페 안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살짝 구부리는 젊은 웨이터에게서 돛 달린 범선이 그려져 있는 남성용 로션의 싱싱한 머스크 향이 난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익숙함이 편안함이라는 것을. 지난 어느 날처럼 크로와상 하나에 에스프레소 더블 한 잔을 탭 워터 한 컵과 함께 주문한다. 


"파리에 오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늘도 그는 오지 않으려나 보다."     


파리에서는 그인지 그녀인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일상이다. 미처 잠에서 덜 깨어난 텁텁한 입안을 탭 워터 한 모금으로 씻어 내리고 향 강한 진갈색의 카페인을 조금씩 흘려 넣는다. 아침의 첫 빛이 창문을 침투하는 듯 눈이며 정신이 하얗게 맑아져 온다. 


넓지 않은 실내에는 몇 사람이 앉아 빵조각을 뜯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가만히 보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두가, 내가 그런 것처럼, 파리지엔느 없이 혼자 온 파리지앵이다. 웨이터에게 짧은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 외에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남정네들의 첫 허기를 커피와 빵으로 달래는 곳이 파리의 카페인가 보다. 어쩌면 어둠 속에서 겨우 떠오르는 파리의 첫 빛이, 파리지엔느보단 파리지앵을 더 허기지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파리에서의 새벽 허기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영혼이 허전해서 인 걸까."           


몇 개 테이블을 내놓은 야외 테라스를 쓸어가는 새벽바람이 상쾌할 것 같긴 하지만 혼자서 맞기에는 아직은 차가울 것도 같다.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저 자리에 앉아도 좋겠다, 고 생각한다. 괜하게 일어난 용기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을 세월이 준 현명함 덕분이라 여기기로 한다. 밖으로 난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길을 따라 길게 쳐놓은 와인빛 어닝에 가려 비스듬하게만 더듬어볼 수 있을 뿐이다. 


"금방 데워 나온 크로와상 하나에 따뜻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파리의 새벽은 혼자만의 축제가 열리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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