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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어버린 촛대를 찾아서, 파리의 아침

식어버린 촛대를 찾아서, 파리의 아침

          

밤의 그것 같기도 하고 새벽의 그것 같기도 한 검뿌연 어둠이, 지난밤 잠자리에 들며 쳐둔 진갈색 커튼의 틈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온다.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 켜며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밀어 연다. 새벽의 바람은 계절과 상관없이 차게만 느껴진다. 팔을 뻗으면 금세라도 닿을 듯한 가까이에서 개선문의 황금색 불빛이 별의 광장 에뚜와루를 밝히고 있다. 


관광안내책자에 박혀있을 법한 잘 빠진 모습보다는 가릴 곳은 가리고 보여주고 싶은 곳만 은밀히 드러낸 새벽 개선문의 자태가 몹시 유혹적이다. 격자 모양 나무 창에 칸칸이 끼워진 새벽의 기운이 홀로 밤을 새운 개선문을 더욱 호젓하게 만들고 있다. 눈을 뜨는 첫 시간마다 마주하는 저 풍경에 나의 시간과 공간이 파리로 이동했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찻물을 끓여 아일리쉬 블랙티를 진하게 우려내어 마시며 다시 창가에 선다. 새벽 파리의 유혹은 지나간 시간을 더듬게 만든다. 

"그때의 나에게, 가장 진실한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는다는 것이, 단어와 텍스트 속에 동굴과도 같은 도피처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새벽의 상념은 늪과도 같아서, 빠져나오려 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럴 때면 머릿속이 흘러가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좋다. 시간이 토막이 깜빡깜빡 지나고 잔에 고인 찻물에서 온기가 떠나간다. 객실 문을 열고 나와 로비층 코너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러 조식을 챙겨 먹는다. 파리나 런던이나 뉴욕이나,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에서는 그리 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객실로 돌아와서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를 머신에 끼워 넣는다. 주르륵 떨어져 내리는 진갈색의 액체에서 향 좋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여행지에서도 어떤 것들은 일상에서처럼 그냥 흘러가게 된다. 그럭저럭 아침 단장을 마치고 등가방을 챙긴다. 떠나온 곳에서나 이곳 파리에서나 이른 아침의 시간은 마을 어귀를 흐르던 어린 시절의 개울 물살처럼 그냥 흘러간다. 흐른다는 것과 지워진다는 것이 같은 의미를 가진 텍스트라는 것을, 문득 알게 된다.   


***   ***

  

탁자 위에 올려 둔 관광지도 한 장을 집어 든다. 딱히 가야 할 곳이 찾아지지 않는 것을 보니 올만큼 와봤고 돌아다닐 만큼 돌아다녔나 보다. 하긴 길바닥의 느낌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파리지앵과 파리지앤느의 수다가 낯설지 않을 만큼, 파리의 골목과 길을 걸어 다녔으니 이젠 그럴 만도 하겠다. 그래도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마다 어김없이 파리를 찍게 되는 것은, 파리의 유혹은 이성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본다.  

지도를 더듬던 눈길이 센강의 언저리 한 곳에 멈춘다. 


"그래 파리는 에펠탑이지."


하루라도 에펠탑을 보지 못한다면 파리에 있어도 행여 파리를 잊어버리게 될 것 같다. 에펠탑을 향하는 걸음으로 오늘 여정을 시작하기로 한다. 몇 해 동안 등에 붙여 다닌 검붉은 와인색 등가방을 둘러멘다. 딱히 조바심을 내지 않았는데도 발걸음은 벌써 호텔문을 나선다.      


"파리의 하늘은 그렇게 가까에서 올려다봐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 굳이 에펠탑을 올라야 할 필요는 없을 거야."  


불 꺼진 파리의 마른 촛대 에펠탑 꼭대기에 물기 오른 감상의 심지를 박아 넣을 수 있다면, 축축하게 식은 작은 불꽃이라도 다시 지필 수 있을 것 같다. 바쁠 일이라곤 하나 없는 파리의 아침, 에펠탑을 향하는 이방인의 사색은 여정을 잃어버린 걸음처럼 두서없이 이어지다가 에펠탑 그늘에 이르러서야 가야 할 길을 겨우 알아차린다.  


"돌이켜 보면, 텍스트를 망명처 삼았던 지난날, 시간은, 내가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나의 삶을 규정한 것은 나에 의해 무수히 이루어졌던 결정과 회피와, 타협과 배신이었고 또한 그때마다의 나의 걸음걸이와 가슴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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