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헤세를 따라 피렌체의 안갯속에서

헤세를 따라 피렌체의 안갯속에서


헤세의 안개에 대한 고찰

헤르만 헤세는 시와 소설에서 ‘인생의 안개’에 대해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안개란 무엇인가를 덮거나 가리는 불투명한 막이긴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허용하는 비유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개는 그것을 덮거나 가리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숨김과 허용’의 기능을 가진 물리적인 현상이면서 또한 정신적인 막인 것이다. 

    

실생활에서의 안개는 ‘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을 너머 ‘어떤 사실을 숨기기 위한 교묘한 수단’, ‘막연하게 헤매고 다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수단’, ‘어떤 사실이나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 상황’ 등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헤세의 문학 텍스트에 나타나는 안개는 좀 더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것을 ‘헤세가 어린 시절 신학교를 다녔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연결 짓고 있다. 그 배경이 어찌 되었건 헤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안개의 실체는, 답을 찾기 어려운 철학적인 질문과도 같아서 속이 보이는 것 같긴 하지만 뿌연 장막 뒤에 숨겨져 있어 정확하게 더듬어 헤아리기는 어렵다. 어쩌면 헤세조차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수도 있고 애초부터 답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헤세의 삶과 작품세계를 이해한다면 한 걸음 더 그것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답을 알지 못할 때면 답일 수도 있는 것, 또는 답일 것 같은 것이 답을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철학의 정수리가 신에 관한 철학이 아니던가,” 

“헤세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안개 뒤편에 가려져 있는 신의 영역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쌓아 올린 지식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신의 영역’으로 그것을 밀어올림으로서 ‘답을 찾은 것 같은’ 대리 만족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즉 우리라는 인간이다. 무엇이 다른 무엇을 ‘대리’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질 필요는 없다. 헤르만 헤세도, 대문호라는 타이틀을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지식은 인간을 더욱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또는 생각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수단이자 도구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준다는 것’은 능동적인 현상을, ‘만든다는 것’은 피동적인 현상을 일컫는 표현이다. 인간의 지식에 대한 반응을 능동적으로 보는 것이나 피동적으로 보는 것은 오직 주어진 상황의 여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인간은 원래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을 불규칙적이면서도 비주기적으로 행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와 생각은 지극히 변덕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호모사피엔스사페엔스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문제는 달이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양면성처럼 인간의 생각은 양면적이라는 것이다. 생각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인간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은 커지게 된다. 그래서 지식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도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이 쌓여갈수록 상실감은 깊어지게 되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게 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고, 무엇인가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인간이다. 말년에 헤세가 겪은 정신적인 문제들은, 그가 쌓은 지식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인간의 본능과 행복

달이 뜨고 지는 날이 거듭될수록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땅에 가까운 낮은 삶’에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비록 모든 인간이 그런 식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상당히 많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몸속에 새겨져 있는 ‘편안함과 행복함에 대한 본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은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본능들의 집합체이다. 인간의 삶은 각자가 품고 있는 본능들의 발현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그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지속적이고 어떤 것은 일시적이다. 인간과 인간 서로 간에는 ‘공통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는 ‘일반화된 본능’이 존재하긴 하지만 사실 그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심지어 그것조차도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본능은 어떤 틀로 규정될 수 없으며 설사 규칙을 정한다고 해도 결코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본능이란 철저하고 완전하게 ‘개인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편안하고자 하는 것,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다양하고 무수한 본능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들이다. 인간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본능 또한 다른 본능들과 마찬가지로 때와 곳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어 작용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지나간 그 시절에 지녔던 본능들이 지금의 나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무척이나 이물스럽다. 살아가는 순간순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의 나는 진정으로 행복한가.” 


헤세가 그의 노년에 ‘행복’을 화두로 가졌던 것은 헤세 자신에 의해 ‘개인화된 본능’을 따른 결과였을 것이다. 노년의 헤세가 가족사에서의 어려움과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헤세가 추구했던 행복이란 것이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렌체의 안갯속으로 걸어 나온 헤세의 <안갯속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