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의 밤이 짙어 가면 다른 어딘가의 밤은 옅어간다.
그래서 세상을 덮고 있는 밤의 양은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피렌체가 한 걸음 더 밤의 심장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금세 밤의 호흡이 더듬질 것 같다.
지구 어디인가에서는 밤이, 지금쯤, 끝자락이나마 움켜잡으려 발버둥 치고 있을 것이다.
들어섬과 나섬이 단지 시간의 흐름인 것처럼, 기억에 들어서는 것과 기억을 벗어나는 것 또한, 어쩌면, 단지 의식의 흐름일 뿐일 수 있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밤은, 삶에서 마주쳤던 잠 못 이룬 어느 날의 검은 새벽처럼, 더욱 이물스럽다.
길게 늘어뜨렸던 하루의 여정이 이제야 쉼을 얻는다.
창가에 놓인 티포트에 물을 붓고 끓기를 기다렸다가 티백에 갇혀 있는 홍차를 우려낸다.
밤의 움직임은 행여 누군가 알아차릴 새라 괜히 조심스럽다.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음미하는 홍차는, 우리네의 녹차와도 같아서, 그냥 편하면서도 정겨운 기호식품의 하나이다.
유럽에서는 흔한 게 홍차이지만 머무는 곳마다 다른 감상이 인퓨전되고, 추억의 온도 또한 다르기에 속 하얀 잔에 담긴 색과 맛과 향은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지게 된다.
차를 우려낼 때는 물과 온도가 중요하다. 여행자의 감각이 받아들이는 온도는 감상이라는 주관이 관여되기 마련이고, '언제'라는 시간적 요인에 '어디'라는 공간적 요소와, 날씨 그리고 기온과 같은 체감적인 요인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피렌체의 추억이 인퓨전되기에 적절한 시간이 바로 지금이고 바로 이곳인 것 같다.
하루를 정리하며 밤의 어둠에 갇혀드는 때를 맞추어서 티포트에 토스카나에서 길어 올린 물을 부어 넣고 잠깐의 여유를 더한다.
이윽고 가만가만 끓어오른 물이 티포트의 전원을 내린다.
뜨거움이 식는 시간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는 것을, 살아가다 보니 알아차리게 되었다.
깊은 한숨 같은 열기가 빠져나가길 그냥저냥 기다린다.
정리 안 된 여행가방과 의자 위에 던져 놓은 옷가지가 점령하고 있는 네모난 공간이, 대학시절에 뒹굴던 자취방과 같다고, 문득 생각한다.
홍차를 베이스로 한 유럽의 차는 우리네의 그것보다 다소 진한다.
입을 말린 후에 분쇄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이외에도 식사문화 자체의 차이 또한 우려내어지는 정도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평소 에스프레소를 즐겨마시는 입장에서 보면 정도의 차이가 크지 않지만, 한국식 차나 일본식 차의 맛에 길들여진 여행자라면 찻물을 조금 더 식힌 후에 티백을 담그고, 우러난 색을 눈으로 보고 향을 코로 맡아가면서 적절한 때를 맞춰 티백을 건져내야 할 수도 있다.
창밖을 장식하고 있는 피렌체의 야경은 갓 우려낸 차에 인퓨전된 감상의 덤이다.
처연한 밤이 에워싼 먹먹한 감상에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야경을 읽는다.
오늘 같은 밤엔 연갈색의 말간 차향과 안개 같은 밤의 어둠에 영혼을 맡겨도 좋겠다.
지중해 어느 바닷가에서 달빛에 밀려왔다 별빛에 밀려가던 파도가 가로등 불빛을 품어 안는다.
바람을 따라 어른거리던 순한 어둠이 ‘쏴아.. 쏴아’ 창문을 두드린다.
하루를 아직 마무하지도 못했는데 시계의 작은 바늘이 12를 넘어서려 한다.
‘아, 벌써’, 작은 신음 한 덩이가 입 밖으로 불쑥 밀려 나온다.
12시인지 24시인지 아니면 0시인지, 새로운 날의 첫 번째 시간인지 미완의 어제를 늘어뜨린 시간인지, 생각이 낳은 또 다른 생각이 혼동에 혼동을 더해 넣는다.
밤의 어둠에 갇혀 피어나는 문장은 누군가에겐 삶의 양식이 된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과 귓속으로 스며드는 얘기와, 망막에 붙잡혀 표피에 새겨진 형상과, 피부를 쓰다듬는 살랑대는 감촉과,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와, 침을 고이게 만드는 감미로움까지, 이방인인 된 여행자의 감상들을 밤의 검은 여과지로 촘촘하게 걸러 문장으로 옮겨낼 수 있으니,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삶의 양식은 여행지의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건져 올릴 수 있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의 삶은 일상에서의 그것과는 전개되는 방향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일단 밤의 어둠에 갇힌, 글쓰기에서 살아가는 양식을 취하고 있는 이방인은, 깊은 밤마다 깨어나 글을 쓴 카프카의 시간 속으로 스스로를 이입하게 된다.
문장에 새겨 넣는 지난 시간의 흔적을 끌고서는, 그런 날이면, 긴 사색을 숲을 향해 가만히 걸어 들어가게 된다.
여행지의 밤은 달빛과 별빛의 체온을 통해서야 온전하게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을 찾아낼 수 있게 해 준다.
사실 그 공간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 수도, 언젠가부터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의 확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껏 그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남겨진 자료 또한 없기에, 출처를 밝히거나 증거를 들이대는 짓 따위는, 자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어찌 되었건 여행이 길어질수록 더 많고 더 큰 그 공간을 발견하게 되고 어둠에 뒤엉킨 별빛과 달빛은 제 알아서 그곳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에는 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제 하는 것은 아니리라.
사막의 신기루 같이 어렴풋하긴 하지만 그곳을 떠올리는 일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작은 반감 한토막조차 가지게 만들지도 않고 있으니, 어쩌면 그곳이 여행자를 이끄는 그것은 아닐까.
“걸어가야만 해요, 난 계속 걸어야만 한다니까요.”
한 자리에 머물면서 고도(Godot)를 기다렸다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되기보다는, 비록 방향 없는 길이라 해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방랑자가 되는 편이, 언젠가의 후회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답 없을 것 같은 답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질문은 아직은 살아 움직일 있다는 영혼의 증표이다.
피렌체의 깊은 밤, 어둠에 갇힌 쌀쌀한 불빛에서 여행자의 회귀본능이 돌아갈 곳을 더듬는다.
몇 잔을 마시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헤아려보지 않은 것이 어디 이것뿐이었던가.
하루의 마무리를 차향에 진하게 우려 가두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