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피렌체, 플로렌스를 만난다

피렌체, 플로렌스를 만난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신비한 마법의 주문이다.

여행자를 끌어들인 겹겹의 단상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숲 속의 공주를 깨어나게 하는 백마 탄 왕자의 꿈을 꾸게도 하고, 성채의 돌무더기에 숨어 지내던 검은 용을 찾아 물리치는 은빛 갑옷의 기사가 되는 신비한 꿈에 잠기게도 한다. 


언제 적부터였는지, 애써 기억할 필요는 없겠지만, ‘플로렌스’는 나의 뇌리에 새겨져 내려오고 있는 아름다운 주문이다.

플로렌스에서라면 마법 같은 일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저잣거리 좌판에 늘어놓은 노랗고 빨간 방물들처럼 아무렇게나 만져질 것 같았다.

     

플로렌스(Florence)는 이탈리아의 중부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토스카나(Toscana) 주의 주도(州都)인 피렌체(Firence)의 영어식 표기이다.

따라서 피렌체와 플로렌스의 혼용을 구분 지으려는 짓 따위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며, 글 쓰는 이들의 경우 그날의 감상이나 문맥에 따라 혼용하고 있는 지명이다.

베네치아(Venecia)와 베니스(Venice)가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서로 다른 단어인 것처럼, 피렌체와 플로렌스 또한 하나의 지명에 대한 이음동의(異音同意)의 특별한 단어인 셈이다.    

 

이번 여행길에선 특히 플로렌스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고 있다.

'어째서인지'하는 생각을 하다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카페 플로리안>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된다.


카사노바가 즐겼다던 커피와 초콜릿에, 정체를 헤아릴 수 없는 리쿼와 향이 신비롭게 인퓨전된 마법 같은 카페 플로리안의 레시피는 꽃을 나타내는 '플로리'라는 단어의 주문과 함께 300백 년 이상을 이어져서 내려오고 있었다.

플로렌스에 와서도 그 주문의 효력은 굳은 사랑의 맹세와 같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거나, 어쩌면 스스로가 그 주문에 걸려든 것이기에 굳이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입꼬리를 살짝 올리게 된다.      


사람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안에서만 자유로운 존재’이니 나의 지식 안에서 플로리안은 카사노바, 핫쵸코와 커피, 리쿼와 인퓨전이란 단어들과 연결되고 있다.

그렇기에 베네치아라는 단어가 달콤하고 향기로운 레시피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과는 결이 다르게 플로렌스라는 단어는 마키아벨리와 단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도나텔로와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과 연결되기에 무거움을 느끼게 만든다.  

르네상스의 도시 플로렌스에서 느껴지는 이런 무거움은 괜히 여행자의 걸음을 무겁게 만들 것 같다.

아마도 플로렌스에서 플로리안을 떠올리는 것은 마법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설익은 초급마법사의 허술한 주문같이 어리석은 짓일 수 있겠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기차역을 떠난 고속열차는 2시간 조금 더 달려 피렌체의 산타노벨라 기차역에 도착한다.

새로운 공간에서 호흡하는 새로운 공기는 새로운 마법의 기대로 가슴을 뛰게 만든다.

기차역을 벗어나자 아름답다는 조용한 탄성과 함께 눈이 커진다.

플로렌스의 아름다움은 베네치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름다움을, 그냥 눈으로만 즐기기보다는 가슴으로 품으려고 나선 여행길이기에,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되는 길들여진 시야를 저만치로 밀어내어 본다.  

여행길에서는, 눈으로 마주하는 경치와 유형적 유산, 무형적 문화뿐만이 아니라 작은 인연과 자잘한 에피소드 모두를 피부와 호흡으로 들이켜야만 한다.

     

기차역을 벗어나니 성당의 종소리가 눅눅한 공기를 가른다.

허공에 넓게 울려 퍼지는 플로렌스의 첫인사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높은 종탑 끝에 걸려 있는 오래된 종의 울림은 여행객의 걸음을 오백여 년 전의 르네상스 시대로 돌려놓는 마법의 주문이다.  


두오모 성당에서 시뇨리아 광장으로 가는 넓은 길의 중간쯤 자리 잡은 호텔에 짐을 내리고서는 늦은 오후의 산책길에 나선다.

늦은 오후는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내 초저녁을 지나 늦은 저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여행지에서의 늦은 산책은 사람을 괜히 센티멘털하게 만든다.

이제야 시작되는 플로렌스에서의 일정에 가슴에 담아두었던 감상을 머리의 지식과 이성에게 내어준다.


젊은 날, 그가 남긴 글들을 읽고 또 읽으며 그토록 닮으려 했었지만 결코 먼발치에조차 설 수 없었던 마키아벨리와, 보카치오와 단테의 위대한 유산과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도나텔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들이 남긴 흔적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든다.

마음은 저만치에 앞서가고 있지만 걸음은 자꾸 뒤처지는 것은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흔적을 좇다가 보면, 희미한 실루엣 같은 그들의 잔상은, 바스락거리는 여행자의 영혼에게 물기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

갓 짐 푼 첫째 날 저녁을 적시는 이슬비는 괜한 기대에 부풀게 한다.


“이사하는 날에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말을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이슬비가 오면 미처 기대치 못했던 인연이 찾아온다.”는 말로 해석한다.

하지만 안개 같은 이슬비가 내리는 바람 차고 물기 많은 플로렌스의 저녁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외려 빈 나 자신의 영혼일 수 있다는 생각에, 문득, 걸음이 멈춰 선다.

인연을 만나는 것과 빈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 같은 돌바닥 위를 걸어가고 있다.


Rainy night in Firenze, 비가 내린다고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뭣한 물안개 자욱하게 낀 어느 날의 저녁, 피렌체에 겨우 짐을 푼 이방인 한 사람이 길을 걷고 있다.

나보다 앞서 살아간, 나보다 훨씬 뛰어났던 이들이 남긴 흔적들이 이 축축한 수분으로 거리의 가로등 불빛에 여과된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내려두어야만 했던 것들이 미세하게 산란된다.

손을 저으며 큰 호흡으로 들이키려 하지만 저만치 높은 곳에 올라 뿌옇게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