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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희 Dec 26. 2021

[한달살기 곡성일기 2] 집 밖은 처음이라

곡성도 처음, 셰어하우스도 처음, 온통 처음!

처음이다.

집 밖에 나가서 사는 건 처음이다.


엽기떡볶이도, 스타벅스도 없다는 곡성에서 그 처음을 살아보기로 했다니.

게다가 내가 살 곳은 읍내에서도 차로 30분이 떨어진 강빛마을이었다.


안 그래도 겁쟁이인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 가장 큰 캐리어에 꽉꽉 테트리스를 해서 넣고,

우체국 5호 박스를 두 개 부쳤다.


이 만반의 준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소위 말하는 '깡촌'에 산다는 점이 아니었다.

셰어하우스에 살아보는 게 처음이라 그랬다.

넣을 수 있는 것 중 내게 필요할 모든 것을 챙겼다.


빌려 쓰고, 나눠 쓸 수 있을지 아닐지 모르니까 그랬다.

어떤 사람들과 한 달을 함께 살지 모른다는 점이 나를 그렇게 긴장하게 했다.



차를 타고 용산역에 가는 길에는 "내가 정말 곡성에 가는 거야..? 진짜로 떠나는 거야..?"를 백 번은 외쳤다.

오죽하면 엄마 아빠는 가서 힘들면 때려치우고 돌아오랬다.


그게 뭐라고, 그 한 달이 뭐라고 그렇게 걱정했다.

처음인 사람에게 이 한 달의 시작은

버거운 캐리어보다 더 큰, 어마어마한 산처럼 느껴졌다.



낮에 출발해 노을이 지는 것을 기차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을 지나 점점 더 초면인 듯한 풍경과 지명들에 낯설어하며,

그리고 짐칸에 넣어둔 캐리어가 없어져 첫날부터 멘붕이 오는 상상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곡성역에 내리고 본 첫 광경은 깜깜했다. 저녁 7시에 이렇게 빛이 없을 수 있구나!

여기가 곡성이구나.


청춘작당 건물에 찾아가 안내를 받고, 홈메이트 두 명을 만났다.

운영진분들의 픽업과 함께 편의점에 들러 당장 먹을거리들을 샀다.


강빛마을 집에 들어가서는 임시 배정된 룸메이트도 만났다.

네 명이 모여 룸메이트와 방 배정, 홈 규칙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다음날 올 마지막 홈메와 상의할 부분을 남겨두었다.

아직까진, 여전히 '남'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이 날의 내 모습은 우리 집 홈메들만 보았다.

잔뜩 경계하고 낯을 가리는, 애를 쓰는데도 아직 딱딱하고도 소심한 날이었다.

며칠 후 이미 무장해제된 상태로 만난 다른 홈 사람들이 듣고는 놀랄 만큼,

처음이 주는 낯섦은 나를 굳어버리게 했다.



 재밌는 건, 만반의 준비를 한 나와 달리 나의 룸메는 샴푸도, 드라이기, 그릇도, 수저도 없다고 했다.

또 이미 낮에 와서 낮잠을 좀 자다가 100일살이 홈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단다.


'이래도 되는구나' 싶었다.


정말 그랬다.

우리는 혼자 살러 온 게 아니라 같이 살러 온 거였다.

뭐 하나 없는 게 크게 문제 될 곳이 아니었고,

오늘 먹을거리가 없다면 함께 먹으면 되는 곳이었다.


나 역시 내가 챙겨 온 많은 물건들을 룸메와 함께 썼다.

그럴 의향이 충분했고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반대는 아닐까 봐, 내가 함께할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거다.

괜한 걱정을 했던 거다.

우리는 다 함께 살아보려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함께하는 첫 아침식사 후에는 마지막 홈메가 도착했다.

기타를 메고 들어와 '여기 너무 좋은데요?'를 외치며 소란스레 돌아다니는 마지막 홈메 덕에,

다섯이 되고는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우리는 그를 배려해 어제 상의하던 규칙을 되물었고, 홈메는 우리가 어느 정도를 정해둔 게 너무 좋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일지 몰라 또 한 번 걱정하던 이가 그렇게 밝게 들어온 덕에, 마지막 경계심을 풀게 되었다.



오프닝 행사가 있는 공식적인 첫날.

또 한 번 낯선 이들을 잔뜩 만나러 가는 길이니, 이미 우리 홈은 한 공동체였다.

함께 사용할 건조대와 의자, 청소도구를 얻었다.

오프닝 후에는 함께 먹을 음식들을 사고, 쓰레기봉투를 사고, 공동비용을 관리할 총무를 정했다.

오늘부터 우리집 지갑 소유자는 나다!


함께 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더미처럼 걱정한 것보다 평탄한 일이었다.


물론 한 달 안에는 갈등도, 조율도, 타협도, 회피나 인내도 있었다.

평생을 모르던 이들과 함께 산다는 점이 만든 감정의 파도는 어쩌면 자연스러웠고,

처음인 다양한 상황 속에 대처하는 나,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나를 마주하는 일도 재밌었다.


복작복작 다섯 명이 사는 2층 집,

룸메이트와 아침 그리고 밤을 나누는 방,

문 두드리고 찾아가 이야기할 수 있는 옆방.


첫날의 두려움과 설렘이 생생히 그리운 것을 보면,

꽤 성공적인 첫 둥지 탈출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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