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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T 매거진 Mar 31. 2022

카푸어, 그 달콤한 합리화

인생을 걸고 카푸어이기를 선택한 이들을 웃으며 바라볼 수 없는 이유. 

테크 저널리스트 김태영


“진정한 카푸어라면 선금 없이 전액 60개월 할부죠! 월 지출은 자동차 할부에 161만 원, 보험료는 25만 원 냅니다. 기름값은 평균 50만 원 정도고요. 좋은 차가 타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해요. 차가 없으면 연애도 못하는 시대고요. SNS나 유튜브에서 보면 좋은 차를 타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덩달아 눈도 높아지는 거 같아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요즘에는 자신을 카푸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하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실제로 유튜브에는 이런 사람들만 주기적으로 소개하는 채널이 있을 정도다. 수십, 수백 명의 카푸어가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공개 대화방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카푸어는 흔한 사회적 현상이 됐다.


카푸어는 본인의 경제적 여건이나 예상 수입보다 훨씬 비싼 자동차를 가진 가난한 사람을 뜻한다. 이 단어는 1980~1990년대 많은 빚을 내어 집을 사는 사람, 혹은 집이 있어도 가처분 소득이 거의 없는 사람을 일컫는 ‘하우스푸어’라는 신조어에서 파생됐다. 요즘처럼 부동산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기준에선 하우스푸어면 그나마 좋은 의미다. 은행 대출도 능력으로 평가되는 상황에서 가치가 지속해서 높아지는 부동산은 미래를 향한 투자로 해석된다. 하지만 카푸어는 정반대다. 미래를 포기하더라도 당장을 즐기겠다는 철학. 그만큼 경제적으로 상황이 안 좋다고 해석할 수 있다. 카푸어는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있던 개념이다.


‘오늘을 즐기겠다’는 논리의 함정

하지만 이것이 대중적으로 번진 것은 2015년 극심한 취업난으로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소위 ‘N포 세대’가 등장하면서부터다. N포 세대는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을 뜻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이 안 되는 상황에서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연애, 결혼, 주택 구입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희망까지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미래를 향한 저축이나 투자는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산과 지출의 개념이 달라졌다. 당장 원하는 물건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됐다. 여기에 SNS와 유튜브 등 각종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소비 콘텐츠가 가속을 부추겼다. 타인의 소비생활을 디지털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소비의 기준과 범위가 덩달아 높아지게 된 것이다.


“월 200만 원이면 포르셰 끌 수 있다”, “16시간 투잡 알바로 BMW 타는 카푸어”. 제목만으로도 시선을 끌 동영상 콘텐츠가 실제로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직업이 없거나 수입이 거의 없어도 전액 할부로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 되는 차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차는 돈을 모아서 사는 게 아니에요. 질러 놓고 갚는 게 빠릅니다. 더 나이가 들면 이런 차를 탈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간 빚을 다 갚고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칭 카푸어라고 소개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철학을 바탕으로 논리 있게 이야기를 펼친다. 본인의 결정으로 시작한 주도적인 삶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물론 수입보다 훨씬 비싼 차를 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대출이다. 인터넷에는 신용이 낮아도 자동차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차고 넘친다.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서 이자만 내면서 버티다가, 월 지출이 감소하면 캐피털 대출을 실행한다. 



본인 명의로 대출이 어려울 경우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등 직계가족 명의로 돌려서 차를 사거나 통장에 급여 이체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작업 대출을 건다. 신용 등급이 낮아서 대출이 어려운 고객만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중고차 딜러도 있다. 이들에게 문의하면 중고차 비용뿐 아니라 소위 ‘품위 유지비’라고 불리는 수리비와 튜닝비, 기름값까지 넉넉하게 대출해준다. 제2, 3금융권에서 중고차 시세에 최대 110%까지 대출이 설정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함정이 있다. 딜러가 중고차 매물 가격을 적게는 수십만 원부터 수백만 원을 높이 잡아도 흥정할 수 없다. 15~22% 수준인 고금리로 중고차를 사면 빚이 눈덩이처럼 계속해서 불어난다.


“신용등급 8등급인 24살 고객님. 전액 할부, 당일 특별 대출로 품위 유비지까지 넉넉하게 챙겨드렸습니다.” SNS에서 중고차로 검색하면 딜러와 고객이 수입차 앞에서 악수하며 찍은 훈훈한 분위기의 포스팅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영정 사진’이라고 불린다. 젊은 나이에 고액, 고금리로 중고차 계약을 하는 순간 신용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인생이 끝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 카푸어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곧 유지가 힘들다는 걸 곧 피부로 깨닫게 된다. 대출 상환이 연체되면 독촉이 시작되고, 이 상태가 3~5개월 지속되면 자동차가 가압류 처리된다. 이렇게 되면 중고차를 팔아서 빚을 갚을 수가 없다. 곧 캐피털에 차를 뺏기고, 빚은 고스란히 떠안으며 신용불량자가 된다.


턱걸이로 자동차 대출을 갚으며 차를 유지하더라도 매년 세금과 보험이라는 고비를 넘겨야 한다. 값비싼 자동차 보험이나 수리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로 위의 시한폭탄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운이 나쁘면 책임보험으로 운행하다 사고가 나서 내 차는 물론이고 상대방 차와 인적 피해를 보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민사 소송에서 손해배상 판결이 나고, 벌금이 수백만 원씩 나오며 수배가 걸린다.


희망차고 즐거운 내용을 전달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단지 좋은 자동차를 타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 젊고 가능성 있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박살 낼 수도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꽤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카푸어란 현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이건 자동차라는 매개체를 통한 금융시장의 마약과 같다. 달콤한 유혹 속에 당신의 인생을 베팅할 만큼 대단히 치명적이다.


테크 저널리스트 김태영

과학과 공학 분야에 관심을 두고 깊이 있게 고찰하는 것을 즐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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