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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T 매거진 May 04. 2022

이상한 나라의 작가 채지민

작가 채지민이 만든 세계는 치밀한 계획과 단단한 확신으로 가득하다.


editor 김은아 photographer 성종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전혀 다른 세계였다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랄까. 채지민의 작품을 본 관람객의 마음이 그렇다. 공사장에서나 볼 법한 콘이 공중에 떠 있고, 푸른 잔디밭에 난데없는 벽이 세워져 있다.

벽 사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말. 혹시 어느 초현실 영화의 세트장은 아닐까. 그러나 섣불리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추측은 말길. 캔버스를 채운 공간과 평면, 그것이 작가가 말하려는 전부이니까.


공간성, 평면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를 ‘발견’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예고, 미술대학에 진학했지만 ‘내 스타일’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대학생 때도 연극이나 운동 등 그림 외의 활동에 더 열정적이었다. 졸업 즈음까지도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보고 당시 교수님이 조언을 해주셨다. “일부러 어떤 내용을 담으려고 애쓰지 마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물감을 캔버스에 칠할 때 생기는 물리적인 행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작업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너답지 않은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지 말고, 붓질할 때 느끼는 고민을 이야기해라.” 그게 나에게는 평면성과 공간성이었다.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50년 전에 정리를 끝낸 이론이지만, 대학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했기 때문에 굉장히 실질적인 고민으로 다가왔다(웃음). 교수님의 당시 조언이 지금 작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모호한 개념을 캔버스 위에 어떻게 옮겼나.

첫 작업은 하늘에 놓여 있는 타워크레인을 사진으로 담은 작업이었다. 하늘은 실제로는 무한한 공간이지만, 가끔 쨍한 날은 평면의 파란 캔버스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공간이면서 평면인 속성을 동시에 갖춘 장면을 수집하고, 이를 캔버스에 담아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묘한 불편함을 좋아하고, 또 추구하려고 한다. 여전히 평면과 공간, 현실과 비현실, 그 경계에서 부유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초기 작업이 공간성과 평면성을 주제로 내세웠다면, 지금은 이를 체화해서 작품 안에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무척이나 세밀한 설계를 거친다고 들었다.

나의 작업은 의외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작품에 등장하는 구조와 오브제를 포토샵을 이용해 3D 파일로 제작한다. 구조적인 영역을 먼저 구획할 때도, 강렬한 오브제를 먼저 배치할 때도 있다. 어느 쪽이 먼저든,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서 조금씩 화면을 채워나간다. 이렇게 완성된 3D 구조를 바탕으로 캔버스 위에 작업을 시작한다. 최종 완성작과 설계는 90% 이상 일치한다.


작품 속에서 인물, 콘, 동물 등의 소재가 등장한다. 암호 같아서 숨은 뜻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

평소에 가장 이야기 말하고 싶었던 내용이다. 그림 속 요소들이 의미심장하게 놓여 있어서인지,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어떤 서사도 없다. 단지 조형적이고 시각적인 정보에 가깝다. 유일하게 의도한 것이 있다면 거리감이다. 오브제들이 서로 아는 사이처럼 편안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닌 정도. 아주 희미한 관계성이랄까. 이 ‘무의미함’이 어쩌면 나의 맹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그림을 궁금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로 해석되게 만드는 지점이라고도 생각한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도 없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리고 작품 안에 숨겨둔 이야기가 없다고 말한 순간, 해석은 작가의 손을 떠났다고 본다. 각자의 감상을 존중한다. 처음에는 속뜻에 대해 질문받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고, ‘아무 의도가 없다’고 답하는 것도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을 들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냉소적이다, 예쁘다, 동화적이다, 심지어 ‘사이코패스의 꿈같다’는 감상까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성을 관람객이 이야기해줄 때 오히려 새로운 문이 하나 더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작품 속 오브제에는 변화가 있다. 최근에는 동물과 벽이 자주 보인다.

보통은 기호(記號)로만 존재하지만,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경우도 있다. 동물과 벽이 그런 경우다. 작품에 사람을 등장시키면 관람자가 그를 주인공으로 인식하곤 한다. 그래서 어떤 캐릭터성도 배제하기 위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사용한다. 아마 이런 점이 관람객에게 너무 차갑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존재로서 동물을 그려 넣었다. 모든 인물이 등을 돌리고 있을 때 관객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며 소통하는 존재다. 벽은 평면성을 강조하는 소재로 꾸준히 작품 안에 등장해왔다. 그러나 이전까지는 구조를 이루는 바탕으로서 존재했다면, 최근에는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순간 배경을 이루는 벽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간 오브제들 간의 관계가 좀 더 중요한 뉘앙스를 띠고 있었는데, 이제는 벽과 오브제가 상응하는 관계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체계적으로 계산된 작업이라는 점에서 미술보다 수학이 연상되기도 한다.

맞다. 나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컨트롤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좋아하는 거장 작가들-알렉스 카츠, 데이비드 호크니에게 매료된 이유가 자유로운 붓놀림, 즉흥적인 에너지 때문이라는 거다. 이것은 나에게 결핍된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레이어를 쌓는 방식, 계획성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을 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당시 1년 정도는 기존 작업 스타일을 버리고 오롯이 즉흥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결국 원래 스타일인 지금의 그림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비겁한 선택이었다고도 생각하기도 하지만, 후회는 없다.


전혀 다른 방식의 작업을 시도해본 1년 간의 시간은 무엇을 남겼나.

그때 처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순수한 즐거움을 느꼈다. 내가 계산하고 정해 놓은 방식대로 작품이 완성이 될 때는 물론 희열을 느꼈지만, 그 과정은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작업실에 나와서도 다음 날 작업을 할 생각을 하면 설렘으로 두근거려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이런 방식의 연구를 계속할 것인가, 내가 잘하는 기존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 결국 후자를 선택했지만. 직업 작가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압박감 때문에 도전에 대한 심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해봤다는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을 덕분에 나의 방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까지도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었을 것 같다.


작가에게 확신이 있다는 건 어떤 점에서 중요한가.

확신을 갖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전까지는 남의 평가는 둘째 치고, 그림이 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도 확실히 답할 수 없었다. 완성을 하고 나서도 괜찮은 건지, 아닌지를 스스로 모르겠더라. 그러다 좋은 평가를 들으면 그제야 ‘괜찮은가 보다’ 여기게 되는…. 창작자로서 아이러니였다. 지금은 다르다. 내 작품의 어떤 부분이 좋고, 아쉬운지를 안다. 그리고 내가 나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더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앞으로 작업 방향은.

모든 작업은 지난 작업에 대한 리액션이다. 이전 작에서 담지 못한 아쉬움을 다음 작품에 반영하는 편인데, 내년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평면 위에서 이야기했던 공간성을 설치로 풀어내는 작업을 할 생각이다. 회화는 당연히 나의 가장 큰 무기지만, 파생된 분야로 뻗어나갈 생각이 있다.


‘작가 채지민’을 스스로 정의한다면.

이상한 장면을 만드는 작가. ‘이상하다’라는 단어를 고르기까지 오래 걸렸다. 모호하다, 판단할 수없다. 궁금하다. 난해하다. 이런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채지민

주요 경력 런던 첼시대학원 서양화과 석사, 옵스큐라 개인전(2020) 외

예상 가격 24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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