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안주하며 평범하게 월급을 받는 삶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전기전자 공학 또는 기계 공학 같은 소위 취업 깡패가 될 수 있는 학과 중 원하는 곳을 골라서 갈 줄 알았다. 5년 넘게 키워오던 꿈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수많은 수험생들과 마찬가지로 성적 맞춰 토목 학과에 입학하며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입학한 이후부터 학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열심히 탐색했다. 기술 고시에 합격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다 싶어 한동안은 여기에 목표를 두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이대로 하면 행복할까' 하는 고민이 생겨났다. 현실에 안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아갈까, 성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건축사회환경공학부 재학 OOO CEO
그 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1학년 2학기 어느 교양 수업에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IT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강의에서, IT기업 CEO로 일하고 있는 선배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왔는데, 내 시선은 그들을 소개하는 자막에 꽂혔다. '중어 중문과 재학 IT기업 CEO', '심리학과 졸업 OO 서비스 CEO.' 그 순간 영상은 보이지 않고, 이 한마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건축사회환경공학부 재학 OOO CEO '이었다.
순간 이거다! 싶었다. IT 학과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본인의 길을 스스로 개척한 선배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학과 내에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답답함에 고민만 계속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렇게 가슴 뛰는 일을 찾았는데, 개척하지 않고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만 하겠구나'싶었다.
출처: 당시 수강했던 강의명 화면 캡처
IT기업 창업을 하고 싶은데,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작정 해당 교양수업의 강의 계획서에 기재된 담당 교수님 메일 주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구구절절하게 썼지만 핵심은 간단했다. 'IT기업 창업을 하고 싶은데,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였다. 초등학생이 노벨상을 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묻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턱대고 질문한 격이었다. 다행히도 교수님께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곤 수업 속 영상에 출연했던 선배들의 이메일 주소를 보내주셨다.
그렇게 교수님께 보냈던 이메일 내용을 전부 다시 선배들에게 보내고 답변이 오기를 기다렸다. 거짓말 같게도 모든 선배들로부터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답장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꼼꼼하게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중 한 선배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까지 했다. 선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선배에게서 들은 내용을 열심히 적은 메모장을 보니 마음 한편이 뿌듯해졌다. IT기업 창업이라는 목표에 한걸음 다가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출처: 실제 당시에 선배들에게 보냈던 메일 화면 캡처
개발자는 절대 못하겠구나
IT 창업에 완전히 매료되었지만, 실제론 아는 것이 없었기에 관련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찾아 해 보기로 다짐했다.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학교에서 전공 선택 과목으로 개설된 파이썬 강의 하나를 신청했다. 'Hello World!'부터 시작한 나의 코딩 인생의 첫 시작이었다.
한 학기 내내 파이썬 기초 문법과 공과대 수업에서 배우는 딥러닝 관련 라이브러리들, 그리고 이에 동반되는 수 없이 많은 과제와 시험들을 모두 해치운 다음에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학기가 끝나고 '개발자는 절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접한 언어라, 너무 어려운 나머지 시험도 잘 치지 못했으며 배워나갈수록 점차 이것을 활용해 앱이나 웹을 만드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출처: 실제 핸드폰 메모장에 작성 중인 창업 아이디어 노트 화면 캡처
모든 확신은 경험에서 나온다
그런 와중에도 창업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은 채, 학교에서 열리는 창업 관련 강의는 모두 참석했다. 그중 한 강연에서 '창업 노트'를 작성해보라고 권유해주시는 선배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부터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작성해서 창업 노트로 쓰고 있는 휴대폰 메모장의 글이 어느덧 3페이지를 넘게 되었다.
학교에서 창업과 관련해 지원해주는 기관이 있어 담당 선생님과 상담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창업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개발할 아이템도 없기에 나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완전히 내 손으로 실패를 껴안고 바닥부터 성장시켜 나가는 '창업' 자체에 도전하고 싶은지, 혹은 실현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내 손으로 직접 구현해서 만들어 내는 '개발' 자체를 하고 싶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든 확신은 경험에서부터 나오기에, 창업과 개발 둘 다 먼저 경험해봐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처: 지금 개발 중인 프로젝트(노트북 화면 캡처)
열정에 적극성을 더하면 못할 것이 없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아직 막막했지만 그럼에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싫었다. 선배들에게 조언을 얻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아다닌다면 결국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 커뮤니티 내 창업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개발자가 되고 싶고 창업에 관심이 많으며 향후 IT분야로 창업하고 싶다, 아직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보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꼭 연락 달라' 이런 내용이었다.
1학년 답지 않은 패기 때문이었을까. 나를 졸업 학번으로 생각한 분들로부터 수많은 쪽지를 받았다. 그중에서 딱 한 개만 읽고 연락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쪽지를 보낸 대표님은 1년 전부터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이디어는 구체화된 상태이며 개발자 한 분과 기획을 겸하는 두 분과 함께 서비스를 구축 중이라고 했다. 그 분과 만났지만 당연한 말로 1학년이고 실무지식이 전혀 없는 내가 실제 업무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대표님은 창업과 개발에 대한 나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시곤 조언을 해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만남은 끝인 줄만 알았다.
출처: 당시 받았던 수 많은 쪽지 중 일부 화면 캡처
결국 기회를 잡다
겨울방학을 맞이했을 때, 창업과 개발을 어디서부터 공부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나름 혼자서 유튜브도 보고 이것저것 해보던 참에 갑자기 앞서 쪽지를 주셨던 대표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혹시 파이썬은 어느 정도 하셨나요?
보통 이런 걸 물어볼 때는 일을 맡기려는 신호가 아닌가. 설마 했다. 아주 간단한 파이썬 기초 문법만 알았던 내게, 공부해서 배워볼 생각 없냐고 묻는 대표님이 질문하셨고 내 대답은 하나였다.
네, 해보겠습니다.
출처: 당시 대표님에게 받았던 연락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된 스타트업 팀의 일원으로 지냈던 6개월의 시작이었다.
이만 마치며: 일단 해보자!
창업에 대해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내 질문하고, 스타트업이 궁금해 학교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 등 내가 했던 모든 노력들이 상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또 다른 기회를 낳았다. 지금도 '이 부분에 대해 궁금한데 물어볼까 말까', '이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지 도전해볼까 말까'와 같이 할까 혹은 말까 하는 두 갈래 길에 놓일 때마다 이전에 내가 했던 노력들을 떠올리며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할까'를 선택하곤 한다. 이 경험을 통해 막연하게 관심만 있는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무엇이든 해보고자 노력하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