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ves Turn Inside You / Unwound
- <Fake Train>
- <New Plastic Ideas>
- <Repetition>
- <Challenge for the Civilized Society>
일전에 Fugazi의 <The Argument>를 리뷰하면서 이런 논지를 펼쳤던 적이 있다.
"포스트-하드코어는 본질로의 존속을 위한 탈본질적 시도다."
펑크를 좇기 위해선 펑크 기존의 관습을 벗어나야만 했다. 탈관습적 시도에 회의를 가졌던 이들이 '하드코어'를 주창하며 격앙된 열을 지펴낸지도 얼마 되지 않아 그들 스스로 고전 펑크가 범했던 함정에 그대로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똑같이 고리타분해져만 갔다.
즉, 다시 돌아가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 다다랐다. 포스트적 시도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러 이탈적 시도에도 그것이 포스트펑크 및 포스트록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드코어로서의 자격을 잃지 않기 위해선 몇 가지 원칙은 지켜야 했다. 원칙들의 정립에 관해서는 워싱턴 주와 이안 맥케이가 앞장섰다.
그날의 '여름'(Revolution Summer)'은 그래서 일어났다. 그가 고안하고 주도한 혁명이란 영화계의 도그마 운동처럼 규칙들을 재정하고 엄격하게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음악 외적인 극단적 폭력성과 문란함을 철저히 배격했다.
공격성(aggresion)과 폭력성(violence)은 엄연히 다른 것임을 구분하기 위한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행동주의의 곡해로 인해 본질이 훼손되지 않기 위한 순수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을 보전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음악의 성격과, 음악에서의 태도다. 스트레이트 엣지라고 일컫기도 했던 일련의 규칙들 모두 두 가지를 위한 일종의 바리케이드다.
성격은 곧 어그레션이다. 물론 전통과 달리 여기에는 반드시 정치성을 내포할 필요만은 없다. 그러나 어떤 주제에 관련해서든 분노가 없으면 하드코어는 더 이상 물질대사를 할 수 없는 시체와도 같아진다.
태도는 당연히 곧 DIY다. 이것이 없이 작동하는 분노는 없거나 분노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DIY를 위한 게 아니면 순수주의는 있을 이유가 없다. 여기에 대해선 구태여 미사여구조차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의 본질에 도태라는 꼬리표가 달라붙지 않도록--하마터면 그럴 뻔했던 실제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변화된 문화적 환경에 맞춰 제안한 그들의 방법론은 어느 정도의 융합과 절충이었다.
이는 노이즈 록이나 이모코어가 될 수도, 혹은 기존에 반발해 왔던 포스트 펑크/뉴웨이브/얼터너티브 록 등도 있었다.
공통적으로 하드코어로서의 원칙을 의식하지 않으면 '영영 돌아설 수 없는 탈본질'로 고착되기 좋은, 다소 위험한 방법들이다. 그저 조금 더 단순한 소닉 유스나, 조금 더 성난 너바나 사생아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될 수 있는 그런 것들.
그럼에도 그들은 결과적으로 하드코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성취를 이루긴 했다. 그러나 어느 진보적 성취든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의문은 항상 남기 마련이다.
결국 진보는 '안착'이란 것을 이루고 나면 시간이 지나 일정한 방향과 룰이 정해지기 시작한다. 하나둘씩 그 방향을 따르기 시작하고 나면, '안착'은 곧 '고착'이란 것이 되며, 그리하여 새로운 관습과 보수를 낳는다.
그 새로운 관습들을 깨기 위한 아이디어의 양산은 점차 한계를 맞이한 채 또 고리타분해지거나, 지키고자 했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리고 말지 않겠는가.
서론의 고찰은 곧 분류상 해당 장르에 속해 있는 언와운드(Unwound)의 음악을 비교해 보기 위한 것이다. 그게 이번 글의 핵심이다. 여기에는 암시가 필요하다. 밴드 커리어를 특정 기점으로 나누었을 때 각각의 비교에 따른 결론이 상이할 것이라는 암시.
그 상이함 및 변화성은 곧 포스트적 맥락을 넘어서 하드코어의 방향성에 대한 중대한 물음을 재고하는 순간일 것이기에 이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궁극적인 탐구의 목적이다.
그 기점이 정확히 언제를 일컫는 것인지에 대해선 어차피 본론에 이르러 나타날 것이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많겠지만. 일단 매는 나중에 맞기로 하고, 그렇다면 변화의 이전 언와운드는 과연 포스트-하드코어와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가닿아 있을까.
적어도 데뷔작 <Fake Train>에 한해서 그들은 영락없이 리퓨스드(Refused)나 초기 모데스트 마우스(Modest Mouse)의 동족이다. 하드코어 원로 밴드들에 비해선 지적인 젊은이 특유의 영특함을 고의적으로 흘리려 한다.
근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무쇠 같은 격렬함도 그들 기준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인다. 마냥 자신만만한 신세대에게는 그저 선배 말 잘 따르는 우등생의 충실함이 아닌, 예술가적 감각으로 말미암은 독보적 천재로서, 자율적 권한에 의해 선택한 또 하나의 신선함일 뿐이다.
똑똑한 힙스터로서의 취향과 레퍼런스로 떡칠한 빈티지 파피에 콜레로 자신들의 감각을 보란 듯이 젠체하는 커버 아트는-오히려 보기 좋게 설득당해 버릴 것 같아서-얄미울 정도다. 오히려 바로 세우는 것에 대한 목적이 명확했던 푸가지의 이안 맥케이에게 이런 면은 없지 않았는가.
보컬 저스틴 트리스포는 예외 없이 울부짖는다.
Joy Divison 풍의 어두운 포스트-펑크가 그들의 음악적 외연을 확장하는 순간에도, 보컬과 기타가 이끄는 분노는 코어인 채로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하드코어가 두 번째 작품으로 하여금 포스트적인 장치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도로, 포스트-하드코어라는 큰 줄기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포스트적 접근이란 좀 더 연출에 서정성을 부각하느냐, 극적인 면을 살리느냐, 절제와 균형을 맞추느냐 등의 차이에 있다.
이전보다 관습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는 결정을 했고, 새롭게 부여한 낮은 음영은 고전적 사조에 대응하는 입체성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트리오는 여전히 멤버 수에 맞게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에 충실한 악기로 모든 것을 진행한다. 각 악기의 튠이나 강도는 여전히 팽팽하게 조율돼 있다.
90년대까지의 언와운드는 결론적으로 <New Plastic Ideas>와 <Repetition>으로 축약할 수 있다. 물론 <The Future of What>도 충분히 대표작이다.
다만 이 세 가지는 어느 정도 유사한 미학을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 기원이 <New>에 해당하고, 대표가 <Repetition>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둘만 추려 논의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Repetition>에서는 좀 더 소닉 유스의 노이즈 및 피드백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으로 어그레션을 표출한다.
표출 방식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는, 작품을 통해 보건대 여타 하드코어 밴드들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포커스가 있다. 이는 연이은 수록곡 'Lowest Common Denominator'와 'Sensible'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것은 텐션에 관한 것이다. 빌드업, 서스테인, 증폭과 난입, 브레이크다운 등의 여러 기법과 이펙트를 통해 분노를 정신과 감정에서 신체와 감각의 것으로 전이시키는 실험을 거듭한다. 이는 선동과 과격이 일단 우선이고 보는 하드코어의 다소 무지막지한 접근법과는 다르게, 나름대로의 미세함과 대담함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오히려 이것은 하드코어보다 포스트록에서 예민하게 신경 쓰는 포인트다. 흠... 혹은 오늘날 챗 파일(Chat Pile)과 같은 실험적인 슬럿지 밴드가 제법 능숙하게 다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현세대의 후배들이 선배를 보고 배운 것이겠지만, 언와운드가 긴장을 돋우고 깨뜨리는 방식은 소위 '스탑-앤-스타트' 기법이라고 일컫는 도식적인 당대의 전형과는 다른 것이다. 차라리 60년대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오넷 콜먼 등 아방가르드 재즈의('Go to Dallas and Take a Left') 비선형적 전위 및 이론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보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다.
역시나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담한 용기와 번뜩이는 감각의 연장선상이다. 그것이 곧 언와운드가 분노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해한 바대로에 따른, 90년대 파트에 국한한 지니어스들의 모습이다.
언와운드는 <Repetition>로 이제 막 본격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기존의 계보를 이어가는 대신, 다른 실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아니, 그조차도 실은 일부 '매스 록에 근접한 시도를 통한 포스트록의 가능성'으로부터 미끼를 문 것의 연장선상이다.
그럼에도 팬들에게 가장 당혹스러운 시선을 남긴 문제작 <Challenge for a Civilized Society>는 Fugazi의 <End Hits>처럼 변화를 맞이하는 밴드의 과도기적 지점에 해당한다.
여전히 작품에서도 들끓는 기타와 베이스가 춤을 춘다. 그러나 이번 노이즈 활용은 분노가 어그레션이 아닌 카오스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들린다. 경우에 따라 잼에 쓰이는 관악/현악 세션을 실제로 동반하면서까지 프리 재즈의 임프로비제이션을 아예 전방위적으로 휘두른다.
프로그레시브 록/아트 펑크 성향의 대곡 'Side Effects of Being Tired'와 '(Untitled)'는 본글의 메인 소재가 될 차기작 중 두 곡에 대한 프리퀄에 준한다.
건조하면서 딥한 우울을 품은 'Lifetime Achievement Award'의 슬럿지는 냉소적인 로맨티시즘과 사무치는 장송가의 분위기를 사뭇 풍긴다. 도입부로부터 이모 감성이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8분짜리의 'What Went Wrong'은 그러나 <Fake Train>이나 <New Plastic Ideas> 등에서 봐온 초기 이안 맥케이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만큼은 보컬의 창법에 주목하라. 이례적으로 트로스퍼는 울부짖는 대신 가녀린 음색으로 기존과 다른 의미에서의 텐션을 연출한다. 이는 명백한 '떡밥'이다. 여러 트랙에 다소 산만하게 시도 돼왔던 음향적/편곡적 레인지와 더불어서 말이다.
개별적인 소리들의 요소는 물론 난해하기 그지없지만, 앨범 전반의 트랙 구성에 초점을 두어 보자. 오히려 작품은 충실하게, 그리고 의외로 친절하게 가이드라인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언와운드가 어떤 음악을 펼쳐왔는지, 다음 작업부터 어떤 음악들이 예고될 것인지에 대해 각각 초반부와 후반부에 배치했다. 그리고 변화될 모습까지 포함한 밴드 전체의 역사를 순행적 구조를 통해 전개했다.
즉, 포스트 하드코어에 천착해 있던 과거와 그 울타리에 한쪽 다리를 바깥으로 갓 넘긴 현재, 그리고 하드코어 너머의 것에 향해있는 그들의 시선까지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비유적으로 보아, 컴필레이션이자 <Leaves Turn Inside You>의 데모 테이프라고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