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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Oct 12. 2022

청혼

  결혼 7년이 차고 KTX로 문상 가던 날, 당신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리고 식은땀이 가실 때까지 숨을 몰아쉬었지. 당신에게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줬어. 열차 화장실에서 양복으로 갈아입다가 발가락이 바지 밑단에 걸려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고. 그리고 강박이 당신의 몸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내게 보였지. 당신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호흡이 잦아들기를 지켜보았어. 결혼하고 처음이었고 당신 인생에서도 아마 처음으로 남에게 보여주었겠다. 그때 한가지 깨달음과 한가지 느낌이 들었어. ‘아, 나는 이 사람을 견딜 수 있게 태어났구나.’ 그리고, ‘기쁘다.’     


  기쁨. 물결 위에 반사되는 햇빛처럼 엷게 흔들리면서도 무한히 넓은, 확실히 존재하는 기쁨이었어. 결혼 7년 동안 당신이 두려움을 피하려고 내게 퍼부은 오물들을 당신 스스로 모두 거두어들여 한 데 쌓아놓고는 오물더미 옆에서 나를 향해 ‘나랑 같이 살래?’하고 물어보는 것 같았어. 당신이 나를 다 닦아내어 준 기쁨이었을거야. 당신이 스물아홉 살이 되도록 제대도 취직준비도 안 해 놓고선 석 달 만난 나랑 같이 살게 해달라고 부모님께 허락받으러 다닐 때, 나는 그게 당신을 신뢰한 제일 큰 이유였어. 다들 당신보다 더 가지고도 결혼하지 못할 이유를 찾는데 당신은 빈털털이로도 자기 마음에 이를 정직함이 있으니까, 그런 당신과 함께 살고 싶었어.     


  정직. 그런데 그게 결혼하는 순간 당신이 내게서 거둬가 버린 가장 큰 미덕이 될 줄이야. 화를 내고 군림하고 원망하고. 당신 가족들은 당신이 이런 사람인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당신 스스로 가족과 결혼 사이 꼭꼭 숨겼다 풀어놓는 건지 알 수 없었지. 며느리 너는 우리 아들 덕분에 사는 게 괜찮지 않냐는 전화를 거는 시어머니와 내가 ‘엄마-’ 한마디만 했는데, 결혼이 원래 그런 거니까 씩씩하게 살라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친정엄마 사이에서 울고 무너져 내리기를 수십 번 했어. 내겐 지칠 기운조차 안 남았고 당신은 이 결혼에 대해 당신이 완벽했다고 외칠 때 우린 귀국을 했지. 나는 당신에게 정신과에 갈지, 부부 사이를 위한 모임에 갈지 선택 하라고 멱살잡이를 했어. 나와 살고 싶은 마음 하나 턱 꺼내놓고 인생을 시작할 줄 알았던 당신은 부부 주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받아들였고 용기와 호기심을 내어 다른 부부들을 만나주었지.


  당신은 7년 전처럼 다시 한번, 그런데 우리가 같이 산 시간만큼 더 초라해져서는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 옆에 있어 줄 거야?’ 가빠진 호흡으로 손을 내밀었어. 나는 당신이 보여준 만큼 보았고, 괜찮았어. 당신의 몸이 겪는 일이 괜찮았고, 당신이 그런 사람인 게 괜찮았고, 그럴 때 옆에 있는 게 괜찮았다. 이타적인 마음과 동정의 각오로 괜찮았던 게 아니라, 열매가 나무에서 익어가는 걸 보듯,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듯 그냥 그랬어. 나는 당신 손을 잡고 열차에서 내렸지. 나에겐 그 날이 우리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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