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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Jul 17. 2023

구해줘, 동화!

<검둥이 삼보>와 <팥죽할머니와 호랑이>와 <팥빙수의 전설>

1. 


생각을 해보자고, <검둥이 삼보> 이게 무슨 얘긴가 말이야. 


그때는 검둥이란 말이 괜찮았어. 인종차별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는 아이에게, 그야말로 말 그대로 괜찮았지. 내 피부는 햇빛이 닿으면 까뭇까뭇 잘 탔어. 동네에서 나처럼 까무잡잡한 애는 없었으니 <검둥이 삼보>를 만난 순간 아주 동질감이 들었달까. 게다가 새 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렸잖아. 언니 옷을 물려 입던 나에게 산책 가는 삼보의 발걸음은 심장에서 콩콩 울렸지.


그런데 호랑이야! 수많은 호랑이 서사에 노출되기 전이라 그랬는지, 나의 삼보라 그랬는지 이보다 더 낭패스러울 수가 없었어. 호랑이한테 옷가지를 하나씩 내어줄 때, 옷 아니라 팔 다리를 떼어주는 심정이었달까. 삼보가 탈탈 털렸을 때, 이 얘기 왜 이러냐 화가 날 지경이었어.


그때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장면이 펼쳐져. '호랑이들이 나무 주위를 맴돌다 녹아서 버터가 되었습니다.' TV에서조차 달리는 호랑이를 본 적이 없고, 마가린은 먹어 봤어도 버터는 본 적이 없던 때였지. 호랑이가 쌩쌩 달리면 그 줄무늬도 흐릿해 보이는지, 녹은 버터는 꿀처럼 되는지 의심 없는 머릿 속은 하얀 도화지 같았을 거야. 그 장면은 충분한 설명이 되어 사진처럼 콱, 박혀.


그런데 호랑이가 녹아서 버터가 되는 것보다 더 이상한 일이 생겨.

'엄마는 삼보가 가져온 버터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해피엔딩.

해피엔딩?

이게 버터 사러 간 얘기였나? 삼보 죽을 뻔 한 거는? 모자 상봉에 누구 하나는 털썩 주저 앉고, 둘은 얼싸안고, 아이고 내 새끼 살아돌아왔구나 하고 나서, 반드시 그 다음에, '엄마는 삼보가 무사히 돌아온 걸 기뻐하며 버터를 듬뿍 넣은 저녁을 식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해야지. <검둥이 삼보>를 읽고 남은 찜찜함은 버터 맛을 몰라서가 아니라 인형탈을 쓴 것처럼 시종일관 활짝 웃고 있던 삼보와 삼보 엄마에게서 남았어. '엄마가 버터에 기뻐했다.'니. 울지도 못하고 위로도 받지 못한 삼보.



2.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를 읽고 마음에 남은 게 뭐였을까.


남을 찔러 죽이고 지져 죽이고 때려 쭉이고 말아 죽이고 빠뜨려 죽이는 상상 해 본 적이 있나. 나 글을 깨우칠 무렵은, 학교에서 '무찌르자 공산당' 글짓기와 포스터 대회를 열던 시절이라, 김일성을 죽이면 지구에 평화가 오는 줄 알았다. 악몽을 꾸면 김일성이 나오니깐 이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면 어떻게 방어해야 할까 큰 고민이었지.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는 인생 최초의 범죄물이었던 거야.


명절에 시골 할머니 집에 가서 본 멍멍이가 이듬해에 가면 없어서 어디 갔냐 물으면 어른들이 허허 웃으며 '다 그런거'라고 말 해. 팥죽 할머니도 '다 그런 거'여서 어른답게 행동한 걸까? 똘똘 뭉쳐 잘도 돕는 알밤, 자라, 돌절구, 지게, 멍석이라면 할머니를 이고 지고 굴러서 호랑이 없는 동네로 이사갈 수도 이었을텐데. 어런들의 '다 그런 거' 상자에 들어가면 '다 죽는 거'만 나오는 걸까.


할머니가 한숨지으며 팥밭을 일굴 때 절로 드는 연민은 신통방통 알밤에게 응원으로 옮겨졌다가 꽉 물고 늘어지는 작은 자라에게 가서 조마조마해져. 그런데 돌절구가 호랑이를 쓰러뜨리고 멍석과 지게가 힘 한 번 못 쓴 호랑이를 강물에 던져버릴 때는 마음이 인물들에게서 멀어져 갈 곳을 잃어. 할머니를 향한 안도보다는 '다 그런' 세상을 배워야 한다는 무거운 심정이랄까. 평범한 것들이 힘을 합친 부조리를 본 답답함이기도 했을거야. 최근에 제일 비슷한 감정이 드는 컨텐츠를 꼽자면 <그것이 알고 싶다>랄까.



3. 


서점에서 <팥빙수의 전설>을 집어 든 건, 내가 팥빙수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어. 지금은 사시사철 빙수를 먹을 수 있지만 나 어릴 때는 초여름이 되면 동네 제과점 유리창에 팥빙수 광고가 언제 붙나 기다렸거든. 이름이 '팥빙수'인 것은 음식이라면 먹고, 노래라면 듣고, 책이라면 읽어야지, 암.


이 이야기는 첫 페이지부터 참 온화해. 때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좋은 그런 날'이거든. 많은 동화가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심지어 춥다가 덥다가 해서 되던 일도 망가질 것 같은 서스펜스로 시작하잖아. 이어서 주인공 할머니  야무지게 밥도 잘 챙겨 드시고 용모 단정히 하시고 텃밭도 알뜰하게 돌보시니 보기만 해도 든든하고 평화롭지. 근심 어린 팔자 눈썹에 이마 땀을 훔치는 액션이 세트인 여느 동화 할머니들이랑 달라. 올타임레전드 '맛있는 거 주면 안 잡아 먹지.' 호랑이가 나오니 이 동화가 날 어디로 데려갈런지, 이번에도 '역시나'인가 싶어 마음이 좀 멀어져. 그렇지만 씩씩한 할머니가 나왔고, 호랑이가 맛있는 것 앞에서 보통 오두방정이 아니니 조금 더 읽어보자 싶어. 결말은? 우리가 아는(혹은 몰랐던) 팥빙수의 전설이야.


빙수 먹을 때 명치 어디에 시원 싸르르 녹아내리는 느낌 알지. 어릴 때 동화 먹고 체 했는데 이제 싸악 풀린 것 같은 기분이었어. 목숨을 잃을 뻔 했어도 버터나 나르면 그만인 어린이도 없고, 그렇게까지 했어야 됐나 싶은 겉만 불쌍해 뵈는 할머니도 없어. 대신 눈 오는 날마다 영원할 호랑이랑 씩씩하고 부지런한 할머니가 나오지. 누군가를 배 터지게 많이 먹이는 것도 진짜 할머니들을 닮았어. '다 그런' 세상으로부터 풀려난 느낌이야. 


<팥빙수의 전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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