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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May 04. 2024

벙거지를 쓴 남자크로키 1 -9

1 데생  1 -9

“네. 이상하게 인사동은 범준 씨 추억이 들어있지 않네요.” 

질문이 뜻밖이었다. 그 근처를 수없이 오가고 했는데 인사동에 들르지 않은 것이 신기하네요. 근처에 영화관도 있고 공원이 있어도 인사동은 예술의 산실이니까. 원래 인사동이 목적이고 다른 곳이 부수적이었던 때가 많았을 것이라는. 아무리 말을 해도 서울 지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방송국부터 시작해 서울을 무작정 바라보는 외경심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우선은 인사동에 가서 밥 먹고 이야기하죠. 배 안 고파요? 인사동에 제가 잘 아는 비빔밥집이 있는데 고추장 맛이 기가 막혀요.” 

일부러 경화는 여태 배고픈 것도 참았던 건 아닐까. 나는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낙원상가를 지나 식당에 뒤쫓아 들어가면서 얼굴 위쪽으로 피가 몰렸다. 화끈거림이 몰려왔다. 후 –쪽팔려. 좀 주책없이 말이 많아진 건가.

 경화가 안내한 한식집은 붓글씨가 새겨진 한지로 도배해서 그런지 냄새도 한약 냄새가 풍겼다. 밥이 나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니 경화 얼굴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왜요?” 

“아뇨. 경화 씨 배고픈 것도 모르고 제가 제 이야기만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어서요.” 

“아니에요. 정말 좋았어요. 제가 원해서 해 주신 거잖아요. 아름다운 고백이었어요.” 

“어이쿠! 그런 찬사를 받을 정도의 이야기라니. 나 원 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식은땀이 흘렀고 방이 더웠다. 갑자기 할 말을 모두 끝낸 사람들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적이 흘렀다. 이런 분위기를 깨야 할 거 같아 겨우 생각해서 짜낸 말처럼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는 범준과는 전혀 상관없는 건데요. 지금 만나고 있거나 아니면 예전 사귀었던 남자가 없어요?”

 어색한 거는 서로 불편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없어요. 그리고 언중 씨처럼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은데요.”

 그녀의 하얀 미소가 한 번 더 마음을 흔들었다. 얼른 시선을 피해 버렸다가 눈빛을 마주치며 곧바로 말을 받고,이었다. 

“그냥 저처럼 이야기하면 되죠.” 

“그런가요?” 

“그렇죠.” 

“오빠였어요. 나보다 나이가 좀 많은. 어떻게 보면 고등학생 때로 치면 선생님과 제자 같은 나이 차이였어요. 군대도 갔다 오고 복학해서 그렇게 다시 들어오니까 나이 차가 많이 나더군요. 본인 말로는 재수 기간이 좀 길었다고 하더군요. 전 그때 대학에 첫발을 디딘 신입이었으니까요. 저한테 너무 잘해주고 자상했어요. 지금은 안 만나요. 헤어졌어요.” 

경화는 잠시 물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망막에 초점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왜 헤어졌고 그녀의 감정 상태는 묻지를 않았다.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심각해질 거 같아서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이 싫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그 남자분이랑 헤어졌다고 했잖아요.” 

“아. 네. 제 이야기 별로죠? 미안해요. 다른 이야기 할래요? 범준 씨 이야기 더 들려줄 수 있나요?” 

“…….”

그녀한테 궁금한 것이 생겼다. 경화가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거처럼 이야기하는 동안 줄곧 범준의 대한 그녀의 감정을 솔직히 알고 싶었다. 고3 때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가 무척 힘들고 불안하게 보였었다. 그렇지만 다들 그랬던 거처럼 그도 인생의 가장 큰 전화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바로 미국으로의 이민이 그랬다. 사실 그에게서 편지를 받고서야 얼마나 그가 경화를 좋아했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옆에서 그저 지켜보는 거로는 그냥 그렇구나. 저러다 말겠지. 했지만.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에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저도 경화 씨한테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어떤 거요? 뭔데요?”

경화의 맑고 큰 눈이 날 멀뚱멀뚱 바라봤다. 

“경화 씨한테 범준이는 어떤 존재였나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범준이 경화 씨를 무척 좋아했던 거는 아셨잖아요.”

“…….”

“화실에서 짧은 몇 개월이었지만 제가 알고 있기로는 경화 씨가 그에게 취한 태도는 무척 냉담했던 거 같았는데요.”

“그런가요?”

경화는 난감해진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좀 전에 활달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계속 당황해하고 힘든 표정이었다.

“저기…, 미안하지만요. 다른 이야기 하죠.”

“아뇨. 정말 궁금해요. 힘들어도 대답해 주세요. 여태껏 범준이의 편지가 있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마음에 차지하는 부분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닌가요?”

“글쎄요. 그렇게 뭐 냉담했던 것도 마음에 두는 부분도 아니었어요.”

“왜요?”

집요해졌다. 강압감에 쫓기듯이 경화에게 바짝 다가갔다. 범준이 녀석이 경화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을 알렸을 테고 여러 번의 돌진을 그녀가 무시만 하고 있었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분명 범준을 빌미로 내게 다가온 이유가 있을 거다. 그걸 알고 싶었다. 

“그만해요. 언중 씨. 이렇게 만난 거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 언중 씨를 찾는 거 쉽지 않았다고요. 제발…….”

“하지만 미국에서 온 편지 말입니다. 편지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편지도 언중 씨가 전해준 그 편지 한 통만 보관하고 있었어요. 다른 편지는 어디 갔는지 저도 잘 몰라요. 이제 됐죠?”

경화가 약간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경화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 틀림없었다.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내 생각을 남에게 말하는 편은 아니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삶에 내가 끼어들어 관여한다는 자체를 싫어했었는데 경화한테만은 우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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