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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동 Dec 06. 2022

들어가며: 익숙한 앎들, 경계들


스마트폰을 켜고 뉴스를 보다가 보면 깊은 한숨이 나올 때가 종종 있다. 최근엔 ‘전장연(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과 관련된 기사들을 보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기사가 전하는 내용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밑으로 달리는 댓글들 때문이기도 하다.


“출퇴근길 직장인 볼모”, “원시적 불법 시위”, “비문명”…….


세상 사람들은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되도록 아침엔 뉴스를 켜지 않는 편이다.









▲ ‘이준석 VS 전장연 박경석 장애인 이동권 토론’ 유튜브 댓글 창 갈무리 © JTBC News 공식 유튜브 채널






‘세상 사람들은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라는 나의 질문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또 많은 맥락을 생략하고 있다. 누군가는 내 이런 질문을 읽자마자 내가 아침에 뉴스를 켜지 않는 이유에 공감할 것이고, 누군가는 ‘왜?’라고 묻게 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정반대의 이유로 ―전장연의 출근길 시위 그 자체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각자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판단한다. 그러한 판단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러한 ‘앎’은 한편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벽이 된다. 그러나 이 벽은 동시에 우리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하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




친구들 몇과 한 친구의 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즐거운 기억인데, 식사 시간만 되면 함께 놀러 간 친구들 중 한 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문제는 김치였다. 할머니의 손주인 친구에게, 혹은 다른 집 김치 맛에 인류학적(?) 흥미를 느끼는 나에게 그 맛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다른 한 친구에게는 그것을 먹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집 김치가 ‘역하다’는 이유였다. 김치가 무슨 대수라고, 안 먹으면 그만일 수 있겠으나 가족 고유의 음식을 거절하는 일은 때로 그 가족을 거부하는 일처럼 되기도 한다.




김치는 발효 음식이고, 집집마다 넣는 재료들이 달라서 저마다 고유한 맛과 냄새를 가진다. 김치를 먹지 못하는 친구가 느끼는 ‘역함’은 사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영국 킹스칼리지 연구팀1에 따르면 입맛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데, 이런 역함의 반응들은 우리 신체의 방어 시스템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입맛이란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것을 회피하도록 함으로써 신체가 처할 수 있는 가능한 위험을 줄이도록 몇 세대에 걸쳐 프로그래밍 된, 형성된 앎의 결과이다.









▲ 누군가에겐 ‘꿀맛’이고, 누군가에겐 ‘우욱’인 할머니의 김치








김치를 먹지 못하는 친구는 그럼에도 김치에 젓가락을 가져간다. 할머니와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자신의 신체가 오랜 세대에 걸쳐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거부하는 벽을 허물고 경계를 파괴하는 일이다. 고작 김치를 먹고 먹지 않는 일에 대해 내가 너무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1 킹스칼리지런던대학, ‘Journal Twin Reaserch and Human Genetics(2007)’








**




우리는 각자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판단한다.


‘나는 다른 집 김치는 먹을 수 없어.’




그러한 ‘앎’은 때로 우리가 눈치채기 어려운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다.


‘우리 할머니 김치 맛은 항상 ~한 맛이었으니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유효한 방어 기제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차단이 되기도 한다.


‘너네 집 김치는 역해…….’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는 내키지 않는 젓가락을 들고 그것으로 자신의 앎 ―‘내가 먹을 수 있는 김치는 우리 할머니 김치뿐이야’― 을 파괴(해 보고자 노력)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앎들이, 심지어 그것이 유전적인 것일 때마저도 사실은 상황적이라는 점이다. 익숙했던 앎들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면 어렵더라도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 ‘이준석 VS 전장연 박경석 장애인 이동권 토론’ 유튜브 화면 갈무리© JTBC News 공식 유튜브 채널








어쩌면 “출퇴근길 직장인 볼모”, “원시적 불법 시위”, “비문명”과 같은 반응들 역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우리도 모르게 쌓여온 앎이고, 한편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대화할 때마다 내가 그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과, 서 있는 나의 눈높이의 차이가 불편한 감각으로 다가오고, 상황을 피하고 싶다고 느끼도록 한다. 이는 전적으로 경험의 부재, 즉 휠체어를 만나는 경험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우린 얼마나 드물게 휠체어를 만나는가?


앎이 부재하는 이 공간에 익숙한 앎, 누군가에겐 “격리와 배제, 소외의 방식2”으로 작동하는 앎이 들어선다. 그들은 나의 익숙한 출근길을 가로막는 존재, 익숙함에 훼방을 놓는 존재, 그 알량한 익숙함을 위해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로서 경계가 지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이 경계가 어떤 이들을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 이런 앎, 이런 경계들은 수정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나는 이러한 앎들, 이런 경계들에 관심이 많다. 이런 경계들을 파괴하고 또 불가피하게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가는 우리의 삶들을 탐구하는 데에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쓴다.


올해는 철학자 질 들뢰즈를 따라 이러한 경계들을 사유해 보고자 한다. 철학은, 특히 들뢰즈의 철학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가진 경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보자면, 맞다. 어쩌면 나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쉬도록 한다던 ‘세상 사람들’ 역시 내 나름의 자의적인 경계에 의해 구분 지어진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건 ‘나’와 ‘그들’을 끊임없이 가르는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통해 당신들과 만나기를 기대한다. 이를 통해 우리 서로가, 서로를 파괴할 수 있다면 좋겠다.




2 “목소리 없는 자는 없다. 그렇지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만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이렇게 격리와 배제와 소외의 방식으로 된 겁니다. (중략) 권력 투쟁을 하듯이 저희를 다루시면 안 돼요.”


-  ‘JTBC 썰전’, 이준석과의 토론에서 박경석 대표의 발언 중, 2022. 04. 13.








***




일주일 전, 서교동의 한 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새로운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 집 개 메론이는 내가 짧은 시간 집을 비우는 동안에도 집 안에서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침대에 올라가 동네가 떠나가라 ‘하울링’을 한다. 아마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불안감, 초조감의 표현일 것이다. 경험상 이사를 하고 약 일주일이 지나면 이 하울링은 잦아드는 편인데, 윗집에 사는 집주인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에 일을 하고 오전에 잠을 자는 옆집 남자에겐 메론이의 하울링이 고역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메론이와 나는 파운드 케이크를 들고 옆집을 찾아갔다. 메론이의 불안감이 하울링을 하는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곧 잦아들 것이며, 필요한 경우 전화를 주시면 사무실이 가까우니 집으로 금방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말보단, 정체 모를 울음소리로만 존재하던 메론이의 얼굴을 보는 것이 옆집 남자에게 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남자는 내가 이야기하는 내내 어색한 미소로 메론이를 쳐다봤다.


“ㅋㅋ네 놈이었냐!” 하는 듯이.









▲ 아직 하울링을 하고 있는, 실물파 메론이








경계의 파괴는 그 단어의 무섭거나 무거운 느낌에 비해 때로 이렇게 귀여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폭력적이거나 충격적인 경험일 때도 있지만,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시간을 두고 찾아오기도 한다.


물론 옆집 남자와 우리의 갈등이 여기서 끝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이웃과 함께 산다는 것의 어려움이 늘 그렇듯이, 지난한 과정인 경우가 많다.




앞으로 들뢰즈를 따라, 다양한 파괴의 경험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단지 한숨 쉬고 회피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들의 원인을 찾고,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는 일을 해 보려고 한다.

























글쓴이 김지원(석운동)



‘석운동’이라는 이름의 작업자로, 가구와 공간을 디자인하고 제작합니다. ‘아젠다 2.0’의 공동 편집자를 맡고 있으며, 올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내 삶과 주변,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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