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서로를 아껴줘야지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완전 깡촌에서 살았었다. 과자 하나 사먹으려고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까지 가려면, 어린 아이 종종 걸음으로 마냥 걸어서 20분을 가야할 정도로 시골동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어렸을 때는, 사실 과자라는 걸 사 먹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기는 외진 시골이었다. 오죽하면 그 동네 분들은 6.25가 난 것도 몰랐었다고 했으니까.
그 시골에서 내가 어릴 때 살던 그 집은, 그 동네에서는 나름 괜찮은 집이었다. 방이 세 개 였고 집 안에 큰 마당이 있었고 마당 앞엔 밭과 우물, 그 동네를 대표하는 감나무가 있는 그럭저럭 큰 집 이었다. 나는 우리(할머니) 집이 그 동네 제일 가는 부잣집일 줄 알았다.
사실, 어렴풋하게나마 알고는 있었다. 그 동네 제일 가는 부잣집은, 동네 어귀에 소를 많이 키우던 홍씨 아저씨네라는 걸. 하지만, 마당 바로 앞에 커다란 산이 바로 보이는, 산이 더 가까운 우리집이 더 크고 좋다고 생각했다. 산은 우리한테는 놀이터였으니까. 산엔 산딸기와 크고 작은 개울, 풀숲과 포도 나무 등 장난감과 놀이터가 많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침을 먹고 일찍 나가서 해가 져서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올 때까지, 뭘 하는지도 모르게 놀 게 많은 곳이었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때까지도, 할머니가 사시던 그 집은 내 맘 속에선 굉장한 부잣집이었다. 스므살 정도 됐을 때까지도 대충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아프시고 난 후로 그 집에 함께 살던 식구도 자연스레 다 떠났다. 빈집에 헐값에 세를 놓기도 했었지만, 그것도 몇 년 못 갔다. 오륙년 전부터는 그 집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현대식으로 개보수를 전혀 하지 않은 크기만한 옛날 집이었으니까. 삼 년 전에 가봤을 때는 마당헤는 풀이 무성했고 집은 낡아서 부서질 것 같았다. 집은 아주 작게 보였고 흉가 같았다. 그리고 올해에 다시 찾았을 땐 그 집이, 없었다. 깨끗하게 사라졌고 집 터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덩그러니 집터만 남은 땅을 보니 '참, 쓸쓸하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집터를 살펴보고, 동네에 여전히 살고 계시는 몇 안되는 동네 어르신들을 방문했다. 어르신들도 이젠 다 칠순 필순 어르신이 되었고, 동네를 또는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남아계신 분들보다 많았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사진에만 있는 것들이 태반이다. 우리도 이렇게 늙어가는데, 풍경도 길도 이렇게까지 격변을 하는 구나.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집이 있던 공터를 돌아보고, 동네 어르신 몇 분을 만나 뵙고 나서, 아빠 돌아가시고 삼년 만에 아빠를 보내드린 곳을 다시 찾아 가려고 했다. 아빠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나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집과 그 앞에 산.
그런데 아빠를 보내드린 그 산으로 갈 수 있는 길도 사라졌더라. 원래는 집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아주 많았지만 작은 길들은 다 사라졌고, 고작 하나 남은 산으로 이어지는 아주 좁다란 외길은 너무 험해서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참 야속하지.
눈길이라 미끄러워 도저히 가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아빠 안녕." 인사를 했다.
같이 갔던 엄마는 외길 앞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했고, 나는 애써 밝게 인사를 했다.
"아빠 안녕. 날 풀리면 다시 올 게."
시간이 간다는 게, 세월이 흐른다는 게 참 무섭고 슬픈 거구나. 어차피 일어날 일은, 오늘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과 서로를 연민하며 챙겨주고 서로를 웃게 해주면 그만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