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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Jan 10. 2022

개인주의자의 엄마 표류기

- 출산 (feat. 낳다, 또는 낳음) 

출산 (出産)

1. 아이를 낳음.

2. 만들어 내거나 생겨남. 또는 그 물건.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출산의 의미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길고 험난한 과정을 단지 저 한 줄로 설명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무 위키의 설명을 덧붙인다.


분만(分娩) 또는 출산(出産) 또는 해산(解産)은 생물의 번식과정 중 모체가 체내에서 생성된 어린 개체를 몸 밖으로 배출하는 행위로, 종을 막론하고 고귀한 새 생명이 세상으로 처음 나와 삶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순우리말은 '낳다' 또는 '낳음'이다.


나는 연말 생을 낳을 뻔했던 아찔함을 뒤로하고 정확히 1월 하고도 3일에 체내에서 생성된 어린 개체를 몸 밖으로 배출했다. 


남들이 겪는다는 가진통도, 진짜 진통인 진진통도 사실 처음이었기에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결혼 전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일한 대가로 얻은 극심한 허리디스크 질환으로 임신 기간 내내 허리 통증에 시달리곤 했다. 배가 불러오면 불러올수록 늘어나는 하중만큼이나 척추가 견뎌야 할 고통은 심해졌고 오롯이 그냥 참고 또 참았다. 아이를 낳으면 나아지겠지, 무게가 줄어들면 내 디스크들도 비로소 한 숨 쉬겠지 하고 말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 같은 산모들이 아주 많았다. 태생이 허리가 약한 사람들, 무릎이 약한 사람, 발목이 약한 사람 등 모두 다 임신 앞에선 아이를 품었으니 견뎌야 할 임산부일 뿐이었다. 또한 배가 불러오면서 단순히 체중만 증가하는 게 아니라 내 피와 살 속에 부드럽고 진한 영양분이 차차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배불려야 한다는 세포들의 본능적인 움직임에 따라 내 몸은 점점 껍데기만 남는 듯했다. 계단을 오르면 무릎이 시리고, 식탁 앞에 앉아있노라면 허리부터 발 끝까지 저려왔다. 


예정일을 이틀 앞둔 날 밤,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남편이 물었다. 정말 내일도 아이가 안 나올 것 같냐고. 그걸 알면 내가 "출생일 봐드립니다. 단돈 200만 원"  이 정도 써서 걸고 돈이라도 벌었겠지..? 


내일 혼자인데 진통이 오면 어쩌지? 그럼 하루 더 연차를 낼까?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하다 뭔가 울컥하는 기분에 속옷 울 확인하니 다들 입 모아 말하던 그것, 이름도 청순한 이슬이 비쳤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아주 약간은 분만이 가까워왔다는 작은 신호랄까. 나는 그 길로 뒤뚱거리며 남편에게 달려가 " 나 왠지 내일 낳을 것 같아, 출근 하루만 좀 늦춰봐" 하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게 시작이었나요...?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은근하게 시작된 진통이 나의 윗배부터 아랫배까지 골고루 쓸어내리기 시작한 게. 


"출산 전 마지막 만찬 뭐 먹을까요?"  


맘 카페에 종종 올라오는 재미있는 글들의 제목 중 하나다. 사실 임신기간 내내 입덧을 한 게 아니라면 마지막 만찬이랄 것도 없이 임신 기간 내내 매일을 생일날처럼 먹고 싶은 것 원 없이 먹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 자유롭게 외식하기 어려울 걸 알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맛있는 것 중에 제일 맛있는 것을 먹고 출산하러 가고 싶은 그 마음! 


나는 예정일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이가 하나도 안 내려와 있다는 선생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이슬이 비칠 때까지 별 다른 외식을 하지 않았다. 이슬이 비치는 그 순간에도 배가 고팠지만 밤이 늦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간장계란밥이나 비벼 먹고 있던 한심한 나란 산모... 그게 출산 전 마지막 만찬이 될 줄은 나도 아기도 몰랐다. 그럴 줄 알았으면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킬걸. 


밤 11시, 뭉근하게 아파오는 진통에 출산이 임박하진 않아도 하루 이틀 사이 출산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직은 참을만했기에 남편과 커다란 면기에 간장계란밥을 비벼먹고, 딸기도 한가득 씻어와 흡입했다. 그리고는 밑져야 본전이니 내일 아침에 병원이나 가보자고 얘기하며 침대에 누웠다. 


새벽 5시, 비유하자면 타노스가 건틀렛을 끼고 내 등과 허리에 새끼손가락을 주기적으로 튕기는 듯한 진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가 아픈 게 아니라 허리가 아프니, 그리고 엄지손가락이 아니라 새끼손가락 정도이니 이것은 진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입에서 나는 끙끙 소리에 출산이 임박하지 않아 허탕을 치더라도 내가 1등으로 병원문을 열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아침 9시, 낑낑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조수석에 앉은 내 이마에 소복하게 땀이 났다. 엄동설한에 식은땀이라니, 이게 진통일까? 이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묵직함이 진통일까? 의심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건을 살 때도 적당히, 뭐든 고를 때도 호불호라는 것이 없는 나는 출산병원마저도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다른 조건은 살펴보지도 않고 출산병원을 정했다. 매일 운동삼아 걸어갔기에 그 병원의 주차장이 그렇게나 협소 한 줄은 출산 당일 진통 때문에 처음으로 자차를 이용한 날 알게 되었다. 나보다 운전을 늦게 배운 남편은 병원까진 어떻게 어떻게 주행을 했지만 주차장에서 10분을 버벅거렸다. 이리 틀어도 안되고 저리 틀어도 안되고, 진통에 낑낑거리던 내가 옆에서 훈수를 둬도 이 주차전쟁이 끝나기 전에 내가 애를 낳을 판이었다. 


"내려 빨리, 나 차에서 애 낳기 전에" 


남편을 끌어내리고는 부른 배를 안고 운전석에 앉아 주차를 했다. 욕할 힘도 없었다. 느낌이란 게 왔다. 이건 디스크가 아니라 자궁이 보내는 신호라는 걸 


"어떻게 이렇게 참다 왔어요, 70프로는 열려서 무통도 못 맞겠네"


태동검사기계를 붙이고 누워있는 나를 내진 한 선생님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아픈 것을 오래 잘 참았는데 상을 줘야지, 왜 무통 못 맞는 벌을 주시는 거죠? 하지만 따질 힘도 없었다. 그럼 얼른 낳아버리는 게 낫겠네요. 어차피 안 아프게도 못 낳을 거 빨리라도 낳자는 마음으로 온몸으로 시작되는 진통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장이고 제모고 수치스러울 것이 없었다. 점점 다가오는 진통이 얼마나 아플지 불안한 나와, 매일 나 같은 산모를 보는 간호사 선생님 사이에 수치스러움이라는 사치가 끼어들 틈이 어딨겠는가. 아이도 답답한지 내 윗배와 아랫배를 사정없이 발길질하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진통을 보냈다. 


오전 10시 내원, 오후 1시 분만실 입성, 오후 2시부터 윗니 아랫니가 덜덜 떨리도록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다. 옆에 앉아 누워있는 나를 내려보는 남편의 불안한 표정이 너무도 쉬워 보였다.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만 짓다가 아이가 나온다면 나는 이만 번 정도 할 수 있겠는데 왜 이 진통은 나만 겪어야 하나 라는 억울함에 남편 셔츠를 있는 힘껏 쥐어뜯으며 울었다. 


"진통은 오는데 아기가 안 내려오네요, 조금 밀어볼게요" 


간호사 두 분이 내 배에 매달려 이불빨래하듯 사정없이 배를 밀어내렸다. 뱃가죽이 아픈 건지, 뱃속이 아픈 건지, 눈가에 흐르는 건 땀인지 눈물인지 뭐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 분명한 건 지금까지 겪어 본 아픔 중 가장 본질 파악이 안 되고,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괴로운 아픔이라는 것.


한차례 밀어 내리고 나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눈물이 줄줄 흐를 진통이 더 자주 강하게 왔다. 주기를 느껴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넋 나간 정신을 겨우 붙잡고 진통의 박자를 세는 찰나 "벙"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사이가 뜨끈하고 축축해졌다. 양수가 터졌다. 어디선가 미리 읽었던 출산 후기에서 양수가 터지면 아이가 곧 나온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는 기쁨의 내적 함성을 질렀다. 


그 뒤에 과정은 자세히 생각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자니 다시 사타구니가 아파지는 것 같아서 추억 속에 남겨놓기로 했다. 하나 정확한 건 맘 카페 출산 후기는 여러 번 읽으면 불안하기만 할 뿐 큰 도움이 안 되지만 한 번은 정독할 만하다는 것이다. 분만의 사이클은 너무도 다양하고 변수도 너무나 많아서 일반적이라는 말은 소용이 없지만 어느 정도 과정은 모두 비슷하기에 미리 읽어봤던 출산 후기 덕에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대강은 예상할 수 있었다. 


양수가 터지고 격동의 진통을 조금 더 겪은 뒤 2017년 1월 3일 오후 3시 12분, 내원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나는 3.8kg의 여아를 출산했다. 화장대 서랍에서 딱 하나 남은 테스터기를 찾을 때까지만 해도 상상 못 했던 전개였다. 몸은 다 자랐고 나이도 계속 먹어가지만 아이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던 우리가 아이를 갖게 되다니. 


내 피와 살을 나누며 시작된 인생 2막 개회식이 이렇게 화끈하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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