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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Jul 17. 2024

불친절한 커밍아웃

Wavve  모든패밀리를 시청하고-

20대 중반 직장 생활을 하며 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를 하곤 했다. 하나는 신용카드 리볼빙, 둘은 사내연애.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여러 직장을 거치다 그제야 조금 안정적이다 싶은 직장에 자리 잡은 시기였다. 안정을 찾으니 따라오는 공허함을 메우기 가장 좋은 것이 연애였고 직장 말고는 별다른 인맥을 갖지 못한 시기였기에 사내연애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 같았다. 연애를 하는 우리 둘만 빼고 회사 복사기까지 알아챈다는 게 사내연애라는데 나는 맹세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별 후 퇴사까지 이뤄낸 용사였다. 딱 한 명, 가장 친한 팀원이자 동갑내기 친구에게만 연애 1년 차에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뿐, 친구는 입이 무거웠고, 자신도 오래된 연애를 했지만 남의 개인사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나의 비밀을 알게 된 가장 첫 번째 주인공이 되었다는 게 적잖이 부담스러웠는지 하루는 나를 불러 앉히곤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네가 나한테 비밀을 말했으니 나도 말할게 있어"
"뭔데? 그렇게 꼭 물물 교환하듯 안 해도 되는데"

머쓱한 내 대답에 친구는 핸드폰을 들어 오래 사귄 남자친구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 얘 사실은 내 남자친구 아니라 내 동생이야.
그냥 성가신 점이 많아서 남자친구라고 했어"
나 사실은 남자친구 말고 여자친구랑 살아"

허접한 내 사내연애에 비해 친구가 등가교환이랍시고 내놓은 비밀은 너무나도 거대하며, 어쩌면 은밀했고, 내가 들어도 되는 건지 의문인 묵직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뭐야~ 내가 들어도 되는 거야?라고 되묻고, 당황스러운 걸 감추며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그리고도 10여 년이 지난 지금, 친구는 아직도 애인과 함께 동거를 하고, 직장을 다니고, 강아지를 키운다는 소식을 종종 전해오며 잘 지내고 있다. 나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정성스레 사진도 찍어주고, 축하 케이크도 만들어 신혼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쓰고 보니 좀 그래서 변명하지만 내가 얼마나 트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다양성을 존중하는지!를 구구절절 말하고자 했던 얘기는 아니다.  다만 커밍아웃이 듣는 사람에게 이렇게나 친절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예전 기억을 끄집어내봤다.




내가 사랑하는 OTT 웨이브에서 모든 패밀리라는 다큐를 런칭했다. 1,2부를 몰아서 보고, 3,4부를 집안일하며 대충 보고 나니 이제 5부까지 공개되어 내가 봐주길 기다리고 있다.

한국 최초로 출산까지 이뤄낸 레즈비언 커플(부부)와 10년차 게이 커플의 이야기. 사실 레즈비언 커플에 대해서는 예전 여러 보도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얼굴을 비롯 신상을 공개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대단하다 느꼈고, 그때 당시엔 공개하지 않았던 아내까지 이번엔 함께 방송을 하게 된 것이다. 서로의 만남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만남을 법적으로 인정받고(싶고) , 가족을 꾸리며 자녀까지 낳고자 하는 그 과정이 프로그램에 온전히 녹아있다. 얼핏얼핏 봤던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보고 나니 약간 나 자신이 설득당한 걸 부정할 수가 없겠다.

사실 성 소수자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대단한 박애주의자는 아니지만 인간이라면 응당 행복하고자 하는 게 본능이니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법의 테두리에서 뭔 짓을 해도 제3자가 뭐라 할 수 있겠나? 가 내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다 스물 셋 쯤 불친절한 커밍아웃을 당하며 (들으며) 모든 동성애자들이 이렇게 이기적인가 하는 반감이 생기고 말았다.

아빠는 동성애자였다. 아니 동성애자인 상태이다. 아직 돌아가시지도, 나의 과거도 아닌 현재이기에 과거형을 쓸 수 없다.  그때 나는 고작 스물셋이었다. 십여 년을 다투던 부모님은 막 헤어져 서류 정리를 한 상태였고, 나는 서울로 상경해 최저시급을 받으며 첫 직장에서 호되게 구워지고 삶아지는 중에 아버지로부터 고향 집으로 내려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아빠는 항상 그랬다.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누가 어떤 사정이 있던 그건 내 사정보다 당연히 작을 것이며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 말이다.

엄마가 짐을 정리하고 나간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았을 때라 오빠와 나는 아직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경직된 상태였다. 아빠의 호출이 달갑지 않았고, 한번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결국엔 자기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야속하다-로 끝났기에 고향 집으로 내려가는 걸음걸음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고향 집에 도착한 우리를 차에 태우더니 어디론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시내를 지나치고, 숱한 도로를 지나 한적한 강변에 차를 세우고는 우리 남매를 불러내더니 어깃장 놓듯 말을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더라. 혼란스럽고 힘들더라"

뭐 어쩌고 저쩌고.. 나는 너무 황당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3년 남짓, 이혼한 엄마가 짐을 싸서 나간 지 세 달 남짓, 그 엄마를 20년 가까이 여러 가지로 들들 볶던 사람이 가장 큰 피해자인 어린 우리 남매를 세워놓고 한다는 소리가 말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태어날 수 있고, 그렇게 살다 보니 마음처럼 못 살고 여자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를 세워놓고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고 보따리 내려놓듯 자기 마음의 짐을 턱하고 풀어놓는 건 그럴 수 없다. 동성애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와 결혼했고, 부모가 되었으니 내 욕구나 이룰 수 없던 어떤 것들과는 별개로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 의무 따위 안중에 없어 보였다.

우리 남매는 할 말이 없었다. 10년간 이어진 부모님의 불화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언젠간 헤어지겠지, 차라리 얼른 정리했으면 했지만 실제로 엄마가 집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은 다칠 대로 다친 어린애들일 뿐이었다.

할 말이 없으니 입을 꾹 닫고 혼자 떠드는 아빠 앞에서 신발 앞 꽁무니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혼자 떠들기 좋아하던 아버지도 그 상황에선 우리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너희는 어쩌면 그러냐? 위로든, 무슨 말이든 해주진 못할망정..

그 일 이후 아빠가 그 일을 처음 언급하며 꺼낸 말이었다. 우린 어쩜 그랬을까. 위로든 무슨 말이든 해주질 못했을까. 참으로 불친절한 게이의 불친절한 커밍아웃이었다. (자신에게 말고 남에게) 모두가 다 나의 이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 줘야 하고, 특히나 너희는 가족이니까, 어쩌면 자식이라는 나의 소유물이니까! 언제가 되었든 내가 하는 말에 동의든 위로든 해줬어야지!라는 무언의 강요가 섞인 커밍아웃이었달까.. 그 말을 듣고도 우리 남매는 입을 닫았다.

한참이 지나고, 또 한참이 지나고 10여 년이 흘러 나가 살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 주민센터로 향하던 차 안에서 비로소 오빠와 나, 둘만 남았을 때. 우린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난 사실 대충 짐작은 했었어. 그냥 할 말이 없었을 뿐이지"

속 얘기를 하는 게 흔치 않던 오빠의 이야기에 어떻게 알았어? 근데 왜 얘기 안 했어? 같은 철없는 여동생의 반응은 보이기 싫었다. 오빠는 그 뒤로도 결혼한 나 대신 아빠를 더 가까이에서 챙겨야 했고, 다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별 얘기 안 하고 사는 이유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직도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태어나, 그게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고 꽤 오래 살다가 여자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고. 직장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너무 마음 아픈 시간을 보냈던 자기 자신이 측은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이이다. 우리에게 커밍아웃 한 이후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자신에게 위로해달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홀가분하게 살고 있다. 그런 아버지가 밉지도 가엽지도 않다. 다만 아버지가 한때 직장동료에게 마음을 빼앗겨 방황할 때 엄마는 그게 외도인 줄 알았단다. 나의 산후조리를 해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빠도 외도를 했었을 거야 - 확신하며 신세한탄을 하던 엄마의 이야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엄마, 그거 바람피운 거 아니야.. 아빠 혼자 남자를 짝사랑한 거지.라고 말 한들 엄마가 덜 억울했을까? 엄마는 황당해했을 테고 아빠는 나에게 아웃팅을 당한 피해자가 되었겠지..

모든 패밀리를 5부까지 시청하며. 많은 잡념들이 시선 안에서 흘러 다닌다. 부모님이 인정해 주지 않아 가족과 연을 끊은 김규진 씨의 아내, 그런 상황들을 담대하게 안아주며,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임신까지 했다고 호탕하게 웃는 김규진 씨. 10년 된 애인을 데리고 양가 부모님과 한 테이블에 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던 킴과 팩.

아빠가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조금 더 친절한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을까? 동성애도, 거기에 따르는 에티듀드도 조금은 더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불친절한 커밍아웃에 속앓이 하던 게이의 딸이 두서없이 써본 모든 패밀리의 시청 소감이었다. 너무 일찍 태어나버린 내가 아는 유일한 게이의 불친절한 커밍아웃을 뒤늦게 위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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