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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pr 11. 2023

미국형 경쟁과 유럽형 경쟁 (1)

내가 경험한 한국과 미국의 교육(경쟁)

나는 초중고 12년을 한국에서 공부했고 이후 미국에서 6년, 스웨덴에서 2년,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2년째 공부 중이다. 내가 경험한 교육과 그 속의 경쟁을 두 가지로 분류해 보자면 미국(한국) 형 경쟁과 유럽형 경쟁으로 나눌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미국이나 유럽이나 비슷해 보였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느껴보니 같은 서구형이어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직접 느꼈던 두 가지의 전혀 다른 경쟁(또는 교육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한국에서 12년간의 교육

나는 초중고에서 공부를 정말 지지리 게 못했다. 초등학교에서 흔하게 받는 백 점 한 번 받아본 적이 없고 80점이 넘으면 다행이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면 90점을 겨우 넘겼고 나는 그걸로 엄마에게 달려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중학교에서는 더 심했다. 평균이 50점을 넘으면 다행이었고 개별 과목에서는 겨우 두 자릿수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내 성적에 너무 충격을 받은 엄마는 그동안에 무관심을 치우고 처음으로 시험 성적 때문에 매를 든 적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내가 했던 공부는 과학공부였는데 순전히 재밌었서 했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내 성적표는 전교 1등과 전교 꼴등이 혼재된 특별한(?) 성적표가 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나름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된 공부 방법을 몰라 기웃거리기만 할 뿐 그다지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거기에 더해 과학에 쏟던 시간을 다른 과목에 기웃거리는데 쓰느라 과학성적도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초반에는 어른들에 눈에 얘는 어떤 아이인지 가늠이 안 간다... 하는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지만 과학성적이 떨어지면서 크게 관심을 쏟지 않아도 되는 아이로 전락했다. 


한 가지 예시를 들자면 한 대학에서 과학에 관심이 많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여름학교가 있었는데 나는 그런 공지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전교 1,2등이던 친구가 그 프로그램에 간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고등교과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닌 대학과정을 가르치는 여름학교였는데 한참 물리에 재미가 들려 혼자 공부하던 나는 그 기회에 도전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었다. 더군다나 거기에 다녀온 친구가 자기는 절대 다시는 물리를 공부하지 않겠다 다짐하는 모습을 보고 더 속상하다 못해 화가 났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에서 6년간의 교육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나는 첫 반년은 미국에서 영어학원을 다녔다. 24시간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이니 밖에 나가서 놀기만 해도 영어공부가 되던 시기라 정말 신나게 놀았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서 대학에 들어갈 때 나는 조건부로 입학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만 있으면 됐고 자소서도 필요 없었다. 그저 학교에서 영어 레벨테스트를 봐서 이후 학교에서 요구하는 영어 레벨 수업을 끝까지 듣기만 하면 됐었다. 


이때부터는 내가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엔 천문학과가 없었는데 좋은 천문학과가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려면 거의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 당시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나를 보며 학을 땠을 만큼,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련하게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과목 A를 받고 원하던 대학으로 편입을 했다. 이때부터 나는 미국이 얼마나 잔인한 나라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편입한 학교의 수업 수준이 너무 높았다. 학생이 뒤쳐지든 말든 교수들은 관심이 없었고 조교들도 항상 피곤에 절어있어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여력이 없었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듯이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매달려가며 겨우겨우 수업을 따라갔다. 그 매달리는 과정이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었지만 모두 그렇게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니 나도 그저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갉아 먹히던 정신이 와장창 깨진 건 본격적으로 졸업 논문을 위한 연구를 시작하면서였다. 


애초에 학생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 교수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연구를 찾고 그 연구실에 들어간다는 게 거절의 연속이고 정말 힘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첫 연구실의 교수님은 정말이지 학생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연구실에 있는 학생인데 이렇게까지 관심이 없을 수가 있나 싶을 만큼 관심이 없었고 나는 3개월 만에 그 연구실을 나왔다. 그 이후 들어간 두 번째 연구실에서는 교수님이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매주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 쓸모없는 사람인지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처절히 확인시켜 줬고 반년만에 나는 머리 빠짐과 불면증을 얻고 그 연구실을 나왔다. 겨우 겨우 들어간 세 번째 연구실의 교수님은 학생에게 큰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지도는 하는 교수님이었다. 이때의 나는 정말 최고의 교수님을 만났다고 좋아했고 나도 드디어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충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허울뿐인 관심과 인정에 그 충족감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허전함을 인정하기 싫어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서도 주변에 한껏 나 자신을 뽐내 내 공허를 감추기 급급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썩은 밧줄 위에서 안간힘을 써서 버티는 상태였지만 지금껏 내가 경험했던 교육이 그러했고 경쟁이 그러했기에 그저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억지로 몸을 잔뜩 부풀려 세상에 나를 보호했을 때가 대학원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평범한 자소서, 성적도 평범, 발표한 논문은 없으며, 거기에 GRE시험 성적은 최하위를 찍으니 미국 대학원에서 나를 뽑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내 열정을 어필해도 나는 장문의 거절 이메일만 잔뜩 받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냥 한 번 넣어볼까 하고 지원서를 넣었던 유럽대학의 합격 이메일을 받은 건 내 인생 최대의 터닝포인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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