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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Mar 05. 2024

공복혈당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건강과 정신병의 딜레마

전조 증상이 있었다. 굵은 비를 뿌리는 소나기의 무거운 구름이 저 하늘 한 켠에서 몰려오듯 무언가 내 몸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긴 했었으니까. 밥을 먹으면 미친듯이 졸렸고 잠을 자면 10시간 넘게 자도 피로가 가시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밤에 깊게 자질 못하고 중간중간 깨고 그 때마다 팔다리가 저렸다. 그렇지만 나는 이게 당뇨의 전조 증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하는 일이 힘들어 그런거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17시간을 내리 잔 날,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 병원에 가서 피 검사를 받았다.


내가 선택한 병원은 동네 의원 중에서도 오래된 병원이었다. 어머니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연세 지긋한 여의사분 한 분이 운영하시는 그런 작은 의원. 나는 그 분 앞에서 이러저러해서 피곤하다. 약을 먹고 있다. 그 약은 정신과약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 분이 정신과 의사들에게 화를 냈다. 아무튼 정신과 의사들은 약을 줄 줄만 알지 피검사를 한 번 제대로 해 주질 않아. 나는 그제서야 내가 먹는 약들의 경고사항에 몇 달에 한 번씩 피 검사를 해 봐야 한다는 문구가 쓰여져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내가 약을 먹은 근 10년 넘게 나는 정신과 의사가 주도하는 피 검사를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피검사를 했다. 공복혈당이 바로 나왔다. 107. 정상입니까. 정상은 아닙니다. 간호사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별 일을 이야기했다. 100까지가 정상이고 그 이상부터는 공복혈당장애라고 했다. 다른 수치는 언제 나옵니까. 내 질문에 간호사 선생님은 목요일(그러니까 지난 주)에 다시 와 보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한 여름에도 두꺼운 양말을 신었던, 당뇨 때문에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의 앙상한 발목을 떠올렸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목요일 다시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내 차트를 보며 말씀하셨다. 중성지방이 높고 콜레스테롤이 높네요. 이대로 가다간 10년 안에 진짜 당뇨가 올 겁니다. 여기서 10키로만 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요. 그러자 여기서 딜레마가 생겼다. 저 원래는 20킬로가 적었어요. 약을 먹고나서 찐 거예요. 당뇨를 위해서 약을 끊을 순 없어요. 인생 내내 자살을 생각했지만 팔다리가 문드러져 천천히 죽어가는 성인병의 선택지는 없었던 나에게 죽음이라는 게 수면위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썩 유쾌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비만을 너무 쉽게 알아. 심지어는 우리가 먹고 있는 약 때문에 살이 찐다고 말하면 그 약 때문에 살이 찐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지. 우리는 낫고 싶어서 약을 먹는데, 약을 먹으면 살이 찐다? 그것도 두 자리수가 순식간에 찌는데 그러면 사회생활에 상당한 무리가 오지. 그래, 거기까지 타협을 해도 당뇨가 오고 콜레스테롤이 높아지고 중성지방이 높아지는 건 다른 문제다. 죽고 싶지 않아 약을 먹는데 죽음으로 한 발짝 가까이 가는 모순. 정신병과 성인병의 딜레마. 정신병을 막으면 성인병이 오고, 성인병을 위해서라면 정신병을 고칠 수 없는. 


그래서 정신병자들이 바라는 건 다른 게 아니다. 한 발짝 한 발짝 다 타협을 한다면 약을 먹는 사람에게 정확한 부작용에 대해서 경고를 해 주길 바라는 마음. 피 검사를 주기적으로 시켜주길 바라는 마음.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죽음으로 가는 삶을 살지 않으므로 최선을 다 해 살 것이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기 위해 운동화도 샀다. 더 이상 과자나 당을 먹지 않고 차와 샐러드와 건강식으로 식단을 모조리 바꿨다. 의사는 3개월동안 노력해보자고 말했다. 뭐 107정도면 식단과 운동만 해도 나아질 수 있다고 했으니까 맘 먹고 10키로를 빼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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